자운영의 일상/자운영 그를 사랑하다

우리가 시적이어야 하는 이유-르네 마그리트

올레리나J 2012. 1. 13. 11:36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세계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익숙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고 관습을 거부하며 실제의 세계를 시험하기 위해 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창의성을 회화속에 표명함으로서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리하여 화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며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음악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듯이 회화를 통해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하려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게 회화란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메타 리얼리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자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항정신의 전달체였다. 그럼에도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는 대상 창조에 지나치게 탐닉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일상의 익숙한 오브제들에 자신의 '시적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뭔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것'을 만들어 내었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서 최초로 중요한 시기였던 1920년대 후반에 그는 영감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려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사실상 이후 작품에서 보이는 다양한 구성 요소와 부차적 이미지에 대한 주요 주제들이 이 시기에 형상화 되었다. 이 무렵의 대다수 작품들은 일상 세계의 요소들을 기발하게 재배치하여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정신 상태를 뒤흔드는 시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1930년대는 예술가, 탐구가, 철학자로서 큰 성과를 이룬 시기였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암시했던 여러 아이디어와 문제의식들을 구체화시켰으며, 완전한 시각적 결실을 맺는데 성공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죽음에 대한 몰두가 그의 회화세계를 지배했다. '관' 시리즈의 작품들이 이 시대의 경향을 대변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여러 형태와 크기의 바위에 매혹되었다. 이 시대에 유명한 <피레네 산맥의 성채>를 통해 바위의 무거움과 부동성에 대한 일반의 고정관념을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공중부양'의 개념으로 깨어버렸다. 그림 <아르곤의 전투>에서도 바위는 구름처럼 공중에 붕 뜨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지 공간속에 일시 정지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400년간 지속된 뉴턴의 절대공간과 시간관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과학관에 회화적으로 동조하는 격이 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사망한 67년까지는 현실과 환상의 이분법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유리창과 이젤의 이미지를 계속 변용 실험했다. <폭포>에서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창문'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숲의 외부와 내부 세계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실재像과 그림像의 통합을 모색했다. 

 

한편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 마그리트 자신의 특성은 말년 작품들에 자주 나타난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 속에 반영되었다. 이 남자는 배출할 길 없는 재능을 타고난 듯하지만 그 어떤 형이상학적인 고독감에 둘러쌓여 있는 분위기를 풍겨 철학하는 예술가로서 마그리트가 평생동안 부대낀 고달팠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Rene Magritte,

 Le Monde Poetique

 

우선 시적인 세계라는 이 작품을 보면 마그리트 에게 있어 커튼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재료가 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길을가는 과정에는 우리 자신안에 독사와 뾰족한 철침과 낭떠러 지가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라는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저히 뚫을수 없을것 같은 이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요..

 

 

 

 

Rene Magritte, Scheherazade

 

 

위의 작품을 보면 이길은 우리가 스스로 뚫는게 아니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뚫어준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헤라자데가 누군지 알아보려면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주인공 으로서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의 샤푸리 야르왕이 바람난 아내에게 배신 당한데서 세상의 모든여성을 증오 하여 신붓감 후보자를 찾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새로운 신부를 맞이하여 재미를 본 다음, 결혼한 다음날 아침에는 신부를 죽여 버립니다. 그러던 중 그나라의 한 대신에게 세헤라자데 라는 어질고 착한 딸이 자진해서 왕을 섬기게되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줍니다. 왕은 이야길 계속 듣고싶은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데, 이야기는 1천1밤 계속된 후. 드디어 왕은 생각을 버 리고 세헤라자데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 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되겠습니다. 배신한 아내란 나의 이웃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이웃이 자신의 순수를 버리고 나를 배신할 때 내가 바로 이 잔인한 왕으로 변 하여 다른 이웃들을 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잔인하게 변한 나를위하여 세헤라자데(하나님) 가 죽임을 당할것을 각오하고 내 안에서 벌벌 떨면서 날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줌으로 내 안의 독사(마귀)와 철침(방해)을 치워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라비안 나이트와 마그리트의 작품을 보면서 내안의 신은 내 안에서 나에의해 그동안 무참히 살해 되었으며 세헤라자데 처럼 벌벌 떠시며 또다시 죽지않기 위하여 매순간 고뇌 하신다는 사실을 마그리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그리트의 세헤라자데가 정말 내 안의 하느님을 의 미하는지를 확인해 보시려면 다음의 작품을 보시면 알 수 있게 됩니다.

 

Rene Magritte,

Scheherazade

 

세헤라자데 하면 림스키 코사코프의 관현악곡도 빼놓을수 없는데 특히 지금 흐르고있는 특히 3악장 젊은왕자와 젊은공주는 역시나 그림의 해석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곡입니다. 또한 최근에 개봉 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도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내안의 세헤라자데로 이해하며 감상을 하면 더 올바른 감상이 될수 있다고 하네요. 저는 부끄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Rene Magritte,

Ceci n"est pas une pomme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 이것이 제목입니다.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릴때 같은그림을 여러번 그리기도 하고 주제별로 그림을 그림니다. 즉, 사과시리즈, 중절모 시리즈, 돌 시리즈, 구름 시리즈, 새 시리즈 등등 이 작품은 그분의 사과 시리즈 중 양식이란 작품과 함께 이해 하여야 작가가 이것은 사과가 아니 라고 우리에게 던지는 간접적 질문에 답을 할수 있습니다. 양식 이라는 작품에서 사과의 의미는 "천연양식" 의 의미로 사용 됩니다. 즉, 성서에 보면 예수가 광야 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실때 허기진 예수에게 악마가 말하길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 로 만들어 보라." 하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느니 라" 하며 악마에게 답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빵은 인공적인 양식이며 과일은 천연양식=말씀을 상 징 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작가가 이것은 사과가 아니라고 할때 그의 모든 작품에서 사과의 참 뜻은 말씀인 것입니다. 마그리트의 양식 이라는 작품에서 빈 액자위에 과일을 액자와 평면이 아닌, 액자와 수직으로 과일을 그려 올리는데 그 의미또한 액자위에 그려지는 작품들은 살아있는 양식 즉, 말씀 이라는 것입니 다. 말씀에 기초하여 그려지는 그림, 그것이 바로 르네의 초현실 세계이며 작품 세계라는 것입니다. 마그리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상징은 아니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초현실은 비현실이 아니라 가장 현 실적인 현실임을 강변하기 위하여 자신의 작품에 "상징은 없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그리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상징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초현실적 상징은 상징에 그치지 않고 더욱 참된 현실과 연결되기에 작가는 상징이라는 단어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Rene Magritte,

fine realities, 1962

 

이 작품은 마그리트가 거듭난 사람으로서 진정한 대화의 상대(영적형제)를 만날수 없었던 마그리트 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과일(참된 말씀의 세계)위에 테이블이 놓여있지만 의 자를 놓을 자리는 없습니다. 의자를 놓아야 사람이모여 서로 마주 볼수가 있는데 너무 협소해서 의 자를 놓을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마그리트는 영적인 동반자를 만나 지 못함에대한 회의가 반영된 작품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신자들 중에 자신이 거듭난 신자라는 고백을 하는 신자분들이 참 많습니다. 카톨릭 에는 그런 고백들이 거의없고(설령 그렇다해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임), 개신교에는 상당 히 많고, 구원파와 같은 이단에서는 거의 모두 거듭났다고 스스로 주장하는것을 우리는 흔히 듣게 됩니다. 여기서 마그리트가 고백하는 거듭남에 관한 내용의 작품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제 가 느끼기에 이 해설은 조금 카톨릭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는것 같네요. 아마도 해설자가 천주교 인 인듯. ^^;;

 

 Rene Magritte,

 Pleasure Principle, 1937

 

성령이 뇌로 직접 입류하여 영원히 함께계시는 거듭남을 작품을통해 고백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Rene Magritte,

The Great Table

 

푸른 해변에 거대한 과일접시가 놓여 있습니다. 마그리트에게 있어서 해변이란 소외된 정서를 표현 하는 무대로서 등장하는데 피카소의 여섯시대 중 하나인 청색 시대에 그렸던 해변을 배경으로 하는, 피카소의 해변의 의미와 마그리트의 해변의 의미는 소외감을 의미합니다. 화면을 보면 해변을 배경 으로 거대한 돌 사과 접시가 놓여있는데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사과는 이전에 설명드린바 대로 과일 =천연양식=말씀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러니까 너무 커서 먹기에 힘들고 돌이라서 먹기 힘 들며 그래서 해변에나와 거대한 모습으로 우뚝 기념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즉, 소외되거나 왜 곡되어 사용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현실적 한계에 대한 작가의 회의적인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 되겠 습니다.

 

 

Rene Magritte,

high society, 1962

 

이 작품의 제목은 상류사회 라는 작품입니다. 제목부터 살펴보면 상류사회라 하면 뭐니뭐니 해도 신 의 자녀들의 사회가 되겠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보면 구름들이 많은데 구름은 곧 얼룩(현상계에 갇힌 인식의 오류)으로 가득한 이 세상 을 의미합니다. 주름잡힌 입체로 묘사된 커튼은 하늘을 향해 열고 닫는 기능을 하므로 제도적 교회 를 의미합니다. 두 커튼 맨 앞쪽에 있는 반쪽짜리 커튼 형태의 평면은 하늘 색깔이 더 맑은데 이렇 게 묘사한 이유는 이 반쪽 커튼이 영적인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교회또한 인간이라는 육체 안에 거하기에 구름(오류)이 둥실 떠 있습니다. 화면 앞쪽에있는 과일은 빵처럼 가공된 음식이 아니므로 천연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과일이 놓여있는 바닥이 하늘색으로 묘사된 이유는 이곳이 하늘의 말씀을 다루는 영적, 제도적교회 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적 주제로 들어가면, 주름잡힌 왼쪽 입체 커튼의 반쪽과 오른쪽 평면 커튼이 서로 맞닿아 닫혀있는데 두 대상물의 원근법 에 의해 두 커튼 사이에 공간이 생성 됩니다. 바로 이 공간의 묘사는 좁고 험난한 구원의 길을 의미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반쪽의 커튼을 포개어 상류사회로 가는 구원의 길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입체와 평면의 두 반쪽 커튼의 사이를 통해 간다는 것은 두 커튼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만을 너무 앞세운다거나 영적으로 약한 이웃을위해 고려되어진 교회의 각종제도와 교리들 을 무시할수도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마그리트가 카톨릭 교회를 다니면서 신비주의적 영성의 작 품을 그렸다는 점에서 진정한 신비 주의의자의 종교적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great war

 

1964 대전쟁 작품 화면을 보면, 중절모를 쓴 신사가있고 푸른 사과가 얼굴앞에 떠 있습니다. 푸른 과일만을 바 라보게 되겠지요. 마그리트 그림에서 사과는 사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이 첨가되지 않은 천연의 양식=영혼의양식=말씀"을 의미하므로 사람이 말씀을 지향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서 선악의 싸움인 대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미입니다. 지극히 단순한 의미이지만 니체의 말처 럼 시적 감상이란 광기와같은 것입니다. 광기 속에서는 감동의 크기가 다르게 전달되어 오기도 하 므로 이 작품이 시시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rene magritte,

Presence of Mind

 

작품 화면을 살펴보면 가운데 중절모의 신사는 작가 자신입니다. 좌우에 동물들을 묘사한것은 복음 서에서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도 둥지가있고 날짐승도 굴혈이 있는데 나는 머리둘 곳도 없다라고 하신 성서 말씀을 생각하면서 마그리트도 자기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좌우에 새와 물고기 를 연상합니다. 좌측은 새, 우측은 물고기, 그러니까 이 둘의 공통점은 육지의 짐승은 아니라는 점 에서 마그리트는 어짜피 자신은 숙명적으로 새와 물고기와 같은 신세의 존재이며 그러니까, 세속으 로 부터의 소외를 두려워 말자는 자기 암시를 통하여 침착을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위에있는 침착이라는 작품은 거듭난 분들이, 이 세상의 일상적 관계로부터(자주 있을수있는)의 단절 을 맞게 되었을때 침착을 유지하는 마그리트의 방법이 되겠습니다. 마그리트가 서 있는 위치는 광장 으로부터 이탈된 해변(변방)임을 알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복과 중절모를 갖춰 입은채(다듬 어진 영성) 냉정한 자세로 자신의 모습을 잃지않고 있는 포우즈입니다. 좌우에있는 새와 물고기는 땅에서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자신의 고난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서 받는 고난이기에 당연한 것이므로 좌우의 동물들을 자신과 같은입장의 친구들로 보 면서 이 동물들처럼 인간의 세상을 묵묵히 견디어 내겠다는 자기다짐을 하고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 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환난으로 부터 받는충격을 일시적으로 완충시켜 줄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정답은 아니 라는점에서 세상에서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면서도 자신이 죄에 물들지는 않 는 지혜로운 영성과 타자를향한 자기개방의 능력을 하느님으로 부터 받아야 할것 입니다. 그런데 신 으로부터 받는 지속적인 은총은 실천적 신앙인에게 계속 부어 주신다는 점에서 결국 영생의 길을 가 는데 있어서 최종적 승리는 믿음 만으로는 안되며 행위를 통해 선을 실천하는 신앙인들만의 몫이 아 닐까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Red model 1948

 

위의 작품은 붉은 모델이라는 작품으로서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인간의 실존과 함께 이해 하고자 하는 마그리트 신앙의 특성이 잘 반영된 작품이 되겠습니다. 그림에서 보는바와 같이 나무로 차단된 벽은 이 세상에서 초월자에게 다가감에 있어서의 실존적 한 계를 의미하며 가죽구두는 삶의 아픔을 감해주는 도구로서 인간의 동물성에 덧 입혀진 영적인 문명 즉, 개인에게 임한 초월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가죽구두의 일부가 맨발로 묘사된 이유는 신이 우리 내면에 실제로 강생하였다해도 우리 인간은 이 실존이라는 무게를 견디어 냄에 있어서 신이 모든것을 대신 담당해 주는것이 아니고 인간의 몫으로 남은 고통이 있으므로 우리의 발가락은 아프지 않을수는 없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 바닥에는 돌들(다얀한 고통)이 많고 담배꽁초(무의식의 습관)와 그것에 불을 붙이는 성냥개비와 누드사진이 게제된 잡지조각(조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적 정욕)이 흩어져 있읍니다. 이러한 다양한 유혹들을 혼자서 밟고 견디어내는것은 어려운건 아니지만 이러한 유혹에 포로가된 이웃과의 단절이 오히려 더욱 더 크게 마그리트의 실존적 고통을 조여 올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우리는 죄악속에 갇힌 이웃과 어떻게 사회적 관계성을 상실하지 않고 동시에 죄악으로 부터는 분리를 유지할 것이냐 가 중요한 신앙의 지혜요 기술며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과 밖의 고통을 견디는 신자들의 모습을 마그리트는 제목으로서 묘사를 하며 붉 은 모델 즉, 피흘리는 모델 = 십자가를 지고가는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Rene Magritte,

The art of living 1967

 

이 작품은 마그리트가 세상을 떠난해에 그린 작품으로서 걸작중 하나입니다. 양복을 빠져나와(인간 의 의식의 감옥을 빠져나와) 온몸의 육체가 머리로(육적인 감각이 영적 이성으로 통제가능 하게된) 변하여 공중에 떠있는상태(완전 해탈의 상태)를 그린 것입니다. 이 상태가 살아있는 진정한 예술이 라는 것이지요. 미술 음악 문학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도구가 없다면 예술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살아있는 예 술은 행위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니까 이웃의 얼굴(이성)에 직접 그리는 것입니다. 美的理性 의 상호 충돌과 폭발하는듯한 행복, 그것이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의 행복을 감지한 마 그리트는 같은 해인 1967년에 3색 사과를 그리게 됩니다. 빨강 노랑 파랑=성부 성자 성령, 모든 발 랄한 행복의 색을 창조 할수있는 삼원색의 사과=작품 제목이 young love이니까 젊은 하느님을 마그 리트는 발견하게 됩니다. 신구교를 막론하고 성전에서 젊은 하느님을 발견토록 설교하는 성직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인간 은 젊은 하나님을 받을 힘이 부족하고 받아들일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 천년의 말씀의 역사가 흐른 21세기 에도 흰수염의 노인인 미켈란젤로의 하느님이 신의 이미지로 인 간앞에 제시 될 수 밖에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그리트는 악마의 미소라는 작품을 그립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감춘 악마는 미소를 지을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Rene Magritte,

 Connivance, 1965

 

이 작품은 <묵인> 이라는 작품으로서 "신의 침묵"에 관하여 그린 작품입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 도를 기다리며" 에 나오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라는 두 주인공의 포우즈를 보는것과 같습니 다. 그런데 신을 기다리는 이 포우즈는 사실 현대 신앙인의 대부분의 포우즈라는 점에서 우리는 과 연 이러한 바라봄이 올바른 자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그림을 설명하면 돌물고기는 아직은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 입니다. 육지에 살면서 너무나 바 다를 그리워 하기에 마치 망부석 처럼 물고기로 변한 물고기이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기다리는 자 세로 바다로부터 신호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물고기로서 정처없이 절대자 로서의 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가 이렇게 김춘수 님의 시처럼 죽어가기 까지 기다리는 이유는 일단은, 존재자 로서의 신 을 만났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신을 만났으면서도 돌 물고기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은 존재자로 나타나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서의 신으로서 이웃 안에서 다시 대면 하기를 우리에게 원하 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다음과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하는 하느 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너의 이말을 우리가 존재자로서의 신만을 일관되이 갈망한다면 존재로서 이웃안에서 다시 대면하고픈 신은, 침묵할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는 라너의말을 이해 해 보고자 합니다.

 

 

Rene Magritte,

The Castle in The Pyrenees, 1959

 

이 작품은 마그리트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짊어졌던 종교적 실존의 무게를 묘사한 작품이 되겠 으며 동시에 우리 신자들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단 일상앞에서 버티고 견뎌내야 할 자세가 되 겠습니다. 먼저 그림의 제목부터 설명하면 피레네의 성인데 피레네 산맥에는 성 마르텡 수도원이 있으며, 이 수도원만이 아니라 교회 역사상 많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깊고깊은 산중에 숨어있던 수 도원이 한 덩이 큰 바위로 뚝 떼어져 나와 바다 한 가운데의 공중에 중력을 버티며 공중에 떠있습 니다. 저 무거운 바위가 중력을 버텨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여간 힘든게 아니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위위의 성은 마그리트의 종교적 내적세계를 의미하며, 바다의 의미는 인생은 고해라는 말과같이 한 세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마그리트의 이러한 고백을 느끼며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무 게를 혼자만의 무게라고 우울해 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하느님이 주신 숙제라고 생각하며 견뎌내 야 할 것입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신자들이 견뎌야하는 이러한 일상의 무게와 불안은 실존의 신비와 수수께끼로 부 터 참 안정을 비로소 찾게해 주시려는 신의 의지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라너는 말하기를 우리는 일 상의 무게를 신앙의 드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일로 바꿔 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 꿔 놓아서도 안되며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한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이러한 일상의 무게가 겁이나서 일찍이 교회안으로 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 나 교회안의 일상만이 신이 자신에게 준 진정한 실존의 무게인지는 오늘날 교회안에서 거듭나는 분 들이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Rene Magritte,

Empire of lights

 

이 작품을 보면 밤과 낯이 같은 화면에 그려 졌습니다.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예술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글들을 발표하는데 그것은 마그리트에 대한 무지에서 시도하는 불 필요한 노력들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밤과 낯이아닌 빛과 어둠 이라는 영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동일한 화면에 밤과낮이 공존하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 니다. 마을이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이유는 사람이사는 세계는 사람속의 악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 이며, 창공은 사람이 살지않기 때문에 낮으로 묘사를하여 밤과 낮을 한화면에 병치시켜 표현을 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우리 신앙인에게 주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초라한 어둠의 세계에 비해 엄청난 빛의 세계를 바라보며 중생의 여정을 가고 계신 분들이 환난과 시련을 버티며 악 앞에서 당당하게 호연지기를 유지할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이러한 영적 이미지를 구상화하며 중생의 길을 버텨 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다.

 

Rene Magritte,

Heraclitus"s bridge 1935

 

헤라클리투스는 B.C 500년경의 희랍 철학자로서 그의 글은 무겁고 알기 어려운 말로 되어있어 어 두운 철학자로 불리웁니다. 이분의 가르침 중에 이 작품의 그림에 해당하는 말을 적어본다면 "모 든것은 변화의 와중에 있고 흐르고 있으며 사람은 두번 다시 똑같은 흐름속에 들어갈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라 클리투스의 다리" 라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의역 해본다면 "돌아올수 없 는 다리" 가 되겠습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다리중간이 잘라져있고 강물에 얼비친 그림자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명 히 끊어진 다리인데 다른 차원에서는 연결되어 있다는뜻이지요. 이 다리의 성격을 좀더 자세히 알 려면 카톨릭 신학자인 라너의 "죽음의 신학" 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영적 자살(육체적 자살이 아님)을 통하여 인간은 신을 만나고 성장해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형이상학적 자살인 영적 자살은 육체적 자살과 그 결단에 있어서의 심각함은 동등한 비 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이며. 어렵지만 그러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세끼가 보장된 파라오 통치하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버리고 모세를 따라 홍해로 향하는 결단과 같다고나 할까요. 즉, 사막으로 향하는 길인거죠. 그리 고 그 사막의 행군에서 고대인이 아닌 20세기 현대인이 깨우친 결과가 바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인 것입니다.

 

Rene Magritte,

 Not to be reproduced

 

 한국 교회에는 윗 그림의 헤라클리투스의 다리를 건너지도 않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 니다. 성령세례, 구원의시점, 믿음, 신앙, 모든게 가슴에서 시작하고 가슴에서 끝나는게 교회의 현 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차라리 카톨릭 신자들처럼 구원과 성령세례에 관해 조용히 침묵이 나 하면 부작용이나 덜할텐데 교회는 뇌 신경과의사는 없고, 폐질환 환자하고 가슴전문 재활의학과 의사만 있는가 봅니다. 현대의 교회는 알고보면 참 한심합니다. 재현(재생)의 불가능이라는 이 작품은 중생한 사람이, 성령세례받기 전의 의식의 세계로 다시 돌아 갈수 없다는 사실을 마그리트가 그림으로서 독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관찰해보면 책을 비 롯하여 다른 사물은 정상적으로 거울속에 비춰 지는데 마그리트의 얼굴 만큼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작가가 거울을볼때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 보여져야 하는데 자기의 뒷모습이 보여집니다. 이것은 육 체에 갇힌 의식이 아닌 영적인 자유로운 인식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목을 통해 "돌아갈수 없다",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중얼거립니다. 무엇을 재생할려고 그러는 것인가. 거울속에 자신의 얼굴/현상계에 묶인 과거의 의식 세계/ 그렇다면 왜 이 과거의 의 식으로의 유턴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까. 이 현상계에 갇힌 의식세계에서 자연적 감각의 쾌락은 제맛을 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후 이집트에 미련이 남았 있었듯이 마그리트에 게도 이러한 미련이 고개를 들었던 것입니다. 현상계에서 가졌던 의식의 세계란, 절대아가 자기속의 사적환상(기시다 슈의 심리학 용어)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태의 세계를 의미함.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으면 뇌에서 절대아를 지배하던 사적환상 은 대부분 사라지고(신은 일부러 쪼금 남겨둠)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수 있게되며 여기서부터 신과 의 진정한 관계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학습(대전쟁)이 시작이 됩니다. 이 학습은 스파르타식 훈련 이 전개되기에 냉엄한 실존속에서 신을 인식해 나가게 됩니다. 즉, 제대로 깨우치면 타자와의 관계 성을 회복하여 이 세상에서 건강한 삶을 연습하는 기회를 얻게되고 그나마 못깨우치면 타자와의 관 계성이 단절되어 생존이 불가능 해지므로 결국 죽게되는 것입니다.

 

 

Rene Magritte,

the beautiful season

 

이 작품은 삼위일체를 묘사한 작품이 되겠습니다. 마그리트는 카톨릭 신자로서 전통적인 신관을 보 여줍니다. 배경의 죽은 나뭇잎들은 성자에 붙어 다시 생명을 회복할 우리 인간들 입니다. 전통신관 은 이 세나뭇잎이 손을 마주잡고 우아하게 춤을 추면 뒤의 나뭇잎을 솜사탕 만들듯 그 가운데 솔솔 뿌려 생명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Rene Magritte,

Le reconnaissance infinie

 

마그리트의 이 작품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만 가시적 묘사를하고 성령님은 묘사가 되지를 않고 있습 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아버지로 부터 발 출되어 아들을 통해 계속 발출 되시므로 회화적으로 묘사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점을 이해해야 하겠 습니다. 그 이유로서는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위의 작품만이 아니고, 안내자라는 작품과 세헤라자데 라는 작품에서 볼때 항상 성령님을 포함하여 세 주체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Rene Magritte,

Celestial Perfections 1930

 

이 작품은 마그리트가 30대 초반에 그린 작품으로 구름 시리즈중 하나 입니다.마그리트의 구름 시 리즈에는 하늘에 구름만 떠있는 작품도 있는데 특이한 점이 우리가 느끼는 구름에 대한 일반적 감 상과는 다르게 마그리트는 그 작품의 제목으로 CURSE(저주)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왜 그는 저주라 는 제목을 선택하였을까. 마그리트는 하늘의 구름을 구약의 욥기에 나오는 욥이 악마의 저주에의해 온 몸에 피부병이 생겨서 개와장으로 가려운데를 긁었듯이 구름을 하늘의 피부병 즉, 저주의 흔적으로 본 것입니다. 또한 그 의 작품에는 하늘을 합판 무늬로 얼룩을 그려 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구름이 가운데 십자형을 기준으로 하여 4조각으로 나누어 집니다. 저주로 부터의 해방의 시작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구름이 갈라지며 더 큰 행복을 맞이하므로 뒷배경이 밝은색으로 묘사 되어야 회화적 상식인 데 이 그림에서는 검은색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인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통한 인류의 구원을 표현 했다기 보다는 배경이 검은색 인 점으로 보아 개인적 체험에 의한 영적해방을 구름의 갈라짐으로 표현한 것이며 배경이 검은것은 영적체험 후에도 지상에서의 실존적 아픔만은 그대로 마그리트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 한 실존적 아픔을 마그리트는 그의 많은 작품속에서 표현합니다.

 

Rene Magritte,

La grande famille 1963

 

작품을보면 거대한 새가 해변(이쪽세상)을 향해 날아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새와 알은 자주 등장합니다. 새는 알과 병립하는 개념으로서 새가 결과(인류의 완성)라면 알은 과정(인류의 역사)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역사라는 시간이 허용된것은 인간이라는 알이 새가되기 위해 허 용된 시간이라는, 시간론적 역사관을 이 작품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쪽세상의 새들과 다가오 는 거대한(집단) 새가 합해지면 대가족이 되겠지요. 그래서 제목이 대가족 입니다. 지금은 거대한 저쪽의 새가 이쪽을향해 날아오는 시기이므로 모두 자기라는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는 내용이 이 작품에있어 마그리트의 의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새도 절대자를 향 해 나는 법에 익숙지 않고 또한 실존의 무대는 여전히 이곳이기에 새와 식물이 합해지거나 물고기 와 사람이 합해져 해변에 쓰러져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Rene Magritte,

The liberator 1947

 

배경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경을 보면 개선문처럼 생긴 문들이 가득쌓여져 성을 이루었습니다. the heart string(심금)이라는 작품처럼 구름이 반겨 맞으며 내려앉은 것으로 보아 인생이라는 선 악의 전투에서 승리한 분들이 모인 천국의 입구 같습니다. 생명을 의미하는 강줄기가 성문의 입구 에서 흐르기에 푸른초원이 이뤄져 있으며 강물(생명)이 이쪽으로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국경선 처럼 돌무더기가 횡으로 놓여 있고 그 돌 위에 해방자가 앉아 있습니다. 화면 앞쪽을 살펴보면 초원이 아니라 돌멩이(다양한 실존적 아픔)가 흩어진 땅이며 바위위에 앉아 있는(청빈의 수도자적삶) 해방자가 (절대자와 그의 자녀들) 얼굴이 없는 채(인간의 모순적 理性의 배제) 성전의 제단에서 사용하는 성물에 눈과 입을 새긴 채(본질적 세계의 이성과 언어로) 가슴엔 열쇠(구원) 포도주잔(성혈=생명) 새(하늘의 백성) 파이프(제압 하여야할 다양한 습관)를 다짐하며 남루한 가방과 지팡이가 유일한 소유물인(청빈) 해방자가 이곳을 향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져야할 즉, 제도적 교회가 가져야할 자세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러 나 제도적 교회는 신자보다는 교회 자신을위해 존재하는 경우가 오늘날의 일반적 모습이기도 합니 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복면을 쓴 사과를 그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라함은 신 구교 모두를 지 칭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Rene Magritte,

Clairvoyance

 

이 작품은 비교적 이해가 쉬운 작품입니다. 새의 알을 보며 새를 그리고 있습니다. 헤르만헷세의 아프락사스를 향하여 날아가는 새도 알을깨고 나오고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작품 에서도 애벌레를 벗고 나비가 됩니다.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새나 트리나 포올러스의 작품속 나비 모두 인간을 상징 하듯이 천리안 이라는 마그리트의 작품 속 알과 새는 모두 인간을 상징합니다. 자고있는 알=범인, 날고있는 새=거듭난인간, 애벌레=범인, 나비=거듭난인간, 마그리트는 천리안이 라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의 성격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즉, 알=현실속에서 새(미래의 현실=초현실)를 그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천리안 이라고하면 좀 건방져 보이지만 우리나라의 문 학에서도 그러한 흔적들이 발견됩니다.이상의 날개라는 작품 첫 페이지를 보면 이런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지상을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 세상의 하고많 은 여인이 미망인 이라는 내 논리가 여성에대한 모독이 되오? " 여기서 여왕봉은 미혼녀를 상징하 고 미망인은 기혼녀를 상징합니다. 남편이 있는 모든 여자는 어째서 미망인인가. 그것은 모든사람 이 알의상태 즉, 자고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란 생명의 가능성은 있으나 죽은 상태라고 할수있지요. 가능성 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있는 상태인 알(인간) 들에게 깨어있는 결과로서의 새(자유와생명)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을그린 성자 그분이 바로 마그리트인 것입니다. 마그리트는 혼자있을때 가끔 성직자의 제복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 Rene Magritte, Attempting the Impossible 불가능한 시도라는 이 작품은 작가인 마그리트가 여성의 나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팔 은 아직 그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즉, 나머지 팔을 그려 완성함은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이지요. 다시말하면 회화 라는것은 대상의 재조명 입니다. 재조명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화가와 화공 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체의 여자를 그린다는 의미의 뜻은 성에관한 재조명 즉, 깨끗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성 을 현실적으로 인간이 나누고 소유할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놓고 인간적 윤리와 자연이라는 본질적 자유와의 대립적 관계속에서 결국 성적 자유란 사악한 악마의 충동일뿐 자연의 본질이라는 미명하 에 용인될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시도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성적 자유를 합리화 하는 이론이나 행위는 죄악이다. 라는것을 표현한 것이며 "불가능한 시도" 라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그리트의 "사악한 악마" 라는 작품을 동시에 감상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이러한 종교적 신앙과 성적 충동과의 갈등과 내적 깨우침을 표현 한 국내의 문학적 흔적을 살펴보면 황석우씨의 벽모의 묘, 김춘수씨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있으며 그중 눈물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물 :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었다고 한다.

 

 

Rene Magritte,

Le Domaine Enchant(V)

 

매혹된 영역 이라는 이 작품 화면을보면 동화처럼 나무와 사람이 일체가 되어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과 일치된 작가의 의식을 표현한 것이며 화면에는 땅을 살펴보면 건조한 사막과 같은 땅과 물기가 있는 땅으로 두 종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기가 있는 땅은 생명의 땅 즉, 말씀 안 에 있는 신앙을 말하며 건조한 토지는 사막과 같은 죽음의 땅(무신론적 욕망의 삶)을 묘사한 것입 니다. 또한, 사막의 벌판에 우뚝 서있는 돌 의자는 세속적 힘인 부와 권력을 의미하며 돌 의자위의 나무 의자는 부와 권세도 결국 소유자인 그 사람이 향유하는 세월과 그 내용을 볼 때 세월에 의해 썩어 사라지는 나무의자에 지나지 않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화면 속 커튼은 삶을 연극무대로 묘사한 것 이며 산맥과 함께 붙어있는 거대한 새는 아른하임의 영역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부분으로서 아른 하임 이라는 말은 독일의 형태 심리학자인데 그에 대해 마그리뜨가 심취되어 있었으며 마그리트의 "사악한 악마"라는 작품과 "무모한 잠꾸러기"라는 작품속에서 형태심리학을 적용한 작품들이 탄생 하기도 합니다.

 

 

 Rene Magritte,

L"art de la conversation

 

"대화의 예술"이라는 이 작품은 피카소의 "BULL FIGHT 투우"라는 작품을 연상케 됩니다. 피카소의 투우는 그래픽 형식으로 그려진 작품인데 검은황소가 붉은 커튼사이로 목을 들여밀고 실내를 들여 다보고 있으며 탁자에는 촛불과 책 한권이 놓여 있는 작품입니다. 피카소의 화면을 그대로 해석해 보면 빛을 찾아 생명책을 바라보기 위해 몸이 까맣게 타도록 붉은 고난의 불을뚫고 황소의 의지로 치달은 삶의 고백을 묘사한 것인데 마그리트의 이 작품에서도 그와같은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화면을 관찰해보면, 투우가 저멀리 보이는 시가지를 등지고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뚜렷한 목적지를 알고 가는것도 아닌 확신할 수도 없는 미래를향해 생명의 물이 흐르는 낙원을 찾 아와 이제 눈앞에 그 문전이 펼쳐지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 이것이 바로 모세의 운명 이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운명이기도 하였는데 아브라함도 그랬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신과의 대화=친교는 결국 완전한 자기 죽음을 통해 완성 되어지는, 실천을 통한 살아있는 삶의 예 술 이라는 뜻입니다.

 

Rene Magritte,

The alam clock

과일 접시가 그려진 작품이 이젤 위에 뒤집힌 채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 싫은 사람의 사진이 있다면 뒤집어 무시하 듯 사람들은 과일 접시가 그려진 작품을 뒤집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예술을 도구로 할수 있음은 예술의 특수한 표현기능에 있습니다. 특수한 표현의 기능은 말씀과 인 간의 상호 충돌을 방지할수 있으며, 그렇기에 예수는 비유로 자신의 복음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인간의 역사 발전에 발을맞추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드러 내시는데 신이 인간의 문자 언어나 음성 언어로만 자신을 드러 내신다면 인간의 문화와 신의 의지는 충돌을 피할수 없는 결과가 초래 될 것입니다. 그 결과의 한 증거로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바로 그렇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당 시 성직자의 입장 에서는 조직의 안정을 위한 필요적 처형의 의미도 있지만 군중의 입장에서는 예 수와의 문화적 충돌의 결과가 처형을 주장한 원인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의식 문화가 말씀의 예술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예술의 흐름을 예술의 종말로 느끼며, 마그리트는 알람시계라는 제목으로이 작품을 그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품의 최종적 의미를 보면 알람시계는 미리 정해진 시간에 경종을 울리는 시계이니까 말씀의 작품을 뒤집어 놓는 이 시대는 정한때가 다되어 알람시계가 경종을 울리는 시대 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식문화의 한계는 종교적 문화성만이 아니라 윤리적 문화 성에서도 발생하는데, 인간 상호간에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윤리가 있다는 윤리학의 비절대 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Rene Magritte,

The horrendous stopper

마그리트는 예절의 상징인 중절모에 제약회사에서 약품에 적어 넣는 "외부용" 이라는 문자가 적힌 상표를 그려 넣어(The horrendous stopper 1966) 공포의마개(방해자)라고 묘사하며 작품화 합니다.

 

Rene Magritte,

The Tomb of the Wrestlers

이 작품과 바로 아래의 작품은 동시에 비교 설명이 되는 작품으로서 쉬운 작품이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Listening Room

 

이 작품과 위의 두작품 모두 실내를 묘사하고 있는데 어째서 장미=레슬러(레슬링 선수=난봉꾼의 은어) 에겐 무덤이 되는가를 설명 하려면 장미와 과일의 의미를 알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과일= 천연양식=말씀이며, 장미=정열적 사랑=味色입니다. 방안에서 장미를 크게 키웠으니 그방이 영적 무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일=청강실 이라는 작품은 당연히 레슬러의 무덤과는 반대의 내용이 되는 것이겠지요. 과일=천연양식=말씀을 표현하니까 크게 자란 과일은 장미와는 반대로 은총의 방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문학적으로 살펴보면 보들레르의 거녀(巨女) 라는 詩가 레슬러의 무덤에 해당하는 심리 에 젖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마그리트도 "거녀"라는 작품을 그리고 그림 우측을 검게칠한 후 보들레르의 "거녀"라는 시를 적어 넣은 작품이 있으며 The Giantess라는 작품이 곧 마그리트 의 "거녀" 라는 작품입니다. 제가볼때 "거녀"와 "레슬러의 무덤"은 마그리트가 보들레르를 겨냥 해서 그린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Rene Magritte,

The ready-made bouquet

 

기성품 꽃다발 이라는 이 작품은 어려워 보이지만 일반인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수 있는 작품입니 다. 이 작품 화면에서 중요한 부분은 등에 그려진 귀족같은 여자의 의미와 작가의 내면을 의미하 는 신사와 귀부인과의 등 돌림의 의미입니다. 등뒤에 귀족 같은 여자가 그려져 있는 것은 성공한 자에게 따르는 부귀 영화(돈과 여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한 자에게 따르는 기성품 (이미 그래왔던 것)의 부케(축하 꽃다발)이기에 인간에게 축하 받기위한 창작에는 관심없으며 숲 (대자연=본질)을 향한 내용의 창작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가꾸어 내겠다는 작가로서의 자기다짐이 묘사된 작품 입니다.

 Rene Magritte,

Wicked devil

 

이 작품은 "무모한 잠꾸러기"라는 작품과 함께 상당히 난해한 작품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만약 설명을 자세히 한다면 "사악한 악마"라는 작품과 "무모한 잠꾸러기" 라는 두편의 작품 만으로도 책 한권의 분량의 해설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간단히 내용의 윤곽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작품 "사악한 악마"를 설명드리면 "무모한 잠꾸러기"라는 작품과는 반대의 내용이 되겠으며 역시 좌측은 여자의 목 아래인 가슴 상단부터 머리 상단까지의 묘사가 되며, 우측은 앉은 자세의 남자 全身의 모습입니다. 내부의 윤곽선은 좌측의 경우는 여성의 사각턱의 얼굴과 목이며 우측은 위로 부터 차례로 설명하면 물안경 형상(심리상의 형상), 끓어안은 넓은 두 손바닥, 그리고 男根이 되 겠으며 유의점은 내외부의 곡선의 형상은 형태 심리상의 형상이기에 사실의 형상과는 과장 및 변 형이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붉은 모델에 나오는 목재 차단막과 같은 목재가 옴푹패인 바닥을 메운것은 행로의 단절 상태 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영혼)의 성장의 진행에 있어 그 행로에서 발생하는 권태 또는 지연 또는 이탈의 상태에서 악마가 어떠한 내용으로 그를찾아와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 시키는지를 묘사 한 작품입니다.

 

 

 Rene Magritte,

 Le Dormeur Temeraire

 

우선 "무모한 잠꾸러기"라는 작품은 상,하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상단부의 관속에 누워 잠 자는 사람의 이해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기추락 의 절망은 새로운 날개인 영적 탄생을 낳기도 하는 중생에 관한 전,후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단부의 내용은 오랜절망의 잠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마그리트가 자신의 경험으로 오브제 (물건)를 통한 미술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것이며, 화면 중심을 기준으로 좌측은 여자 (수녀처럼 긴 두건을 쓴여자), 우측은 남자(성직자들이 입는 망토를 입고 무릎을 굻은채 무릎위의 다리와 몸 은 세우고 기도하는 자세)의 전신 측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촛불과 사과는 性, 비둘기와 중절모는 마음, 거울은 객관적 理性의 회복, 리본은 만남(묶음)을 의미합니다.

 

Rene Magritte,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성서의 내용을 보면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울(사도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면서 참된 자유의 신을 만나게 되는 사건의 기록이 있습니다. 사울은 이 사건을 체험한 후 인간적 신앙을 버리고 개종을 하면서 이름을 바울로 바꾸며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바울의 인간적 신앙에서 탈피 한 진보된 의식을 마그리트가 공감하며 묘사한 작품이 이작품이며 양복에서 몸이 이탈하는 작품이 마그리트 작품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발전한 의식이 pilgrim(순례자) 이 되겠으며 pilgrim에서 더욱 발전한 작품이 the art of living(살아있는 예술)이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Time of the Wine Harvest

 

포도 수확철 이라는 이 작품은 중절모를 쓰고있는 모습이 포도알 같아서 포도입니다.^^;; 그러나 이 포도 알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을 표현함니다. 요한복음 15장: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Rene Magritte,

The Last Screen 1967

 

이 작품은 전체=개체=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한개의 나뭇잎을 눈에 바짝대고 바라보시면 한그루의 나무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그루의 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면 한장의 나무잎처럼 보이게 되 지요. 나무가 인류라면 나뭇잎은 1명의사람 입니다. "만인 일체 의식" 그것이 마그리트가 사망한 1967해에 그린 최후의 장면이라는 이 작품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Collective Invention 1935

 

공동 발명품 이라는 이 작품을 보면 바닷가에 상체는 물고기 하체가 사람인 생명체가 쓰러져 있습 니다. 인어 공주 와는 반대의 경우인 것입니다. 인어 공주는 바다에서 육지를 원했고 그래서 상체 가 사람이며 이 작품의 물고기는 육지에서 바다를 원했기에 상체가 물고기 입니다. 바다를 원했다 는건 자연을 원했다는 것이며 자연을 원했다는 건, 바다=자연=본질=존재자(신)지향을 말하는 것입 니다. 자기자신의 의지와 절대자의 의지가 공동으로 작용해서 현실의 자기모습이 그림속의 물고기 의 모습이라는 입니다.

 

Rene Magritte,

Song of love

 

바닷가에 머리가 물고기이고 다리가 사람인 한쌍의 생명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바다로(저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내륙으로(이쪽으로) 오지도 못하는 운명이지만 한쌍이 다정하게 해변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 두마리의 물고기는 마그리트와 조르제 입니다.

 

Rene Magritte,

The new years

 

이 작품은 주제의 스케일이 크고 시원하기에 좋은작품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화면의 세그루의 나 무는 인간의 세가지 유형을 묘사한 것입니다. 좌측의 빌보케(장식기둥)부터 살펴보면 빌보케는 이 미 목재 이므로 생명이 없겠으며 돈과 다양한 힘만을 지향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는 인간을 의미하기에 약간의 나뭇가지(회개의 가능성)만 앙상히 남아 있습니다. 머리에는 흰눈이 내려 있으며(냉정한 이성) 나뭇가지엔 잎사귀 하나 없습니다. (겨울나무=자기 자신만을 지향하는) 가운데 나무를 살펴보면 자연의 나무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측의 빌보케 보다는 비교적 자연성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뭇잎이 하나도없는 겨울 나무라는 사실은, 이 나무역시 자기자신의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안으로만 움츠려 드는 나무입니다. 우측의 나무를 관찰 해보면 나뭇잎 같은 나무입니다. 개체(나뭇잎)가 전체(나무) 이며 전체가 개체인 즉, 他者와의 동일의식 속에 삶을 교류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종교 기관처럼 특수한 사회 속에서나 이런 삶이 가능 하겠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측에 놓인 나뭇잎을 우리들은 좌측에 놓는데 반하여 마그리트는 빌보케를 좌측에 배치하고 나뭇잎을 우측에 배치했다는 것은 비정하고 힘 센 부자들을 약자(좌측)로 표현하 며 부러워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혹된 영역(le domaine enchant V) 이라는 작품에서 거대한 돌 의자(영원한 반석)를 부러워하지 않고 숲속에서 나무가 되어 돌 의자 위의 나무의자(돌 의자의 진정한 모습) 를 바라보며 어리석은 욕심 꾸러기들을 불쌍히 생각하는 작가의 정서가 작품 new years 에서 세 그루 나무의 구도적 배치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Lost Jockey

 

"길 잃은 기수"라는 작품2점이 나란히 있습니다. 두 작품은 서로 반대되는 작품이 되겠습니다. 이 두점의 작품은 기수보다는 배경을 유심히 보아야 바른 감상을 하실수 있겠습니다. 우선 위쪽의 작 품을보면 사람처럼 생긴 장식기둥의 숲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기수가 말을 몰고 있습니다. 아랫편 의 작품을보면 나뭇잎처럼 생긴 나무의 숲에서 길잃은 기수가 빠져나오기 위해 말을몰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장식기둥의 나무"와 "나뭇잎처럼 생긴 나무"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장식기둥은 the new years 라는 작품의 가장 왼쪽 나무에도 등장 하듯이 "돈과 다양한 세속적 힘"을 지향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을 마그리트의 초현실적 시각으로 묘사해 보면 나뭇가지가 약간 남은 장식기둥의 모습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장식기둥에 붉은 망토를 입혀 놓으면 구도자가 되고 머리를 둥근 공이 아니라 호리병으로 묘사하면 진정한 자아(절대아)를 소유한자를 묘사한 것이 됩 니다. 호리병에서 불이나오면 실존의 고통을 인내하며 구도를하는 모습을 묘사한것이 되겠습니다. 그러 니까 이 작품에서의 장식기둥은 망토도 안입고 머리가 둥근 공의 모습이므로 富만을 추구하는 세 계가 주는 유혹으로 부터의 자기 경계를 의미합니다. 미술을 하다보면 힘있는 평론가에게 평론도 받고 화랑에 고객도 늘고 이렇게 인정을 받다보면 작가가 작품을 그리는게 아니라 작품이 작가를 끌고 다닌다고나 할까요. 시가 시인을 속이듯 바로 이러한 세속적인 부르주아들의 정서에 자신의 창작의 중심이 흔들리는 현상을 경계하고 자책하며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Rene Magritte,

The Lost Jockey

다음은 위에 있는 길잃은 기수라는 작품을 보면 이 작품에서는 나뭇잎 처럼 생긴 나무의숲이 등장 합니다. 나뭇잎처럼 생긴 나무의 의미는 만인 일체의식=타자 동일의식에 충실한 부류의 사람을 의 미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보면 나뭇잎은 눈 가까이 대고보면 그 잎맥이 나무의 줄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뭇잎 한 장은 한 그루의 나무인 것이지요. 반대로 나무 한 그루를 멀리서 보면 한장의 나뭇잎처럼 보입니다. 즉 나뭇잎 한 장이나 나무 한 그루나 똑같은 것이며 이것은 한 사람의 인간 이 인류 전체처럼 귀중하다는 사실과같은 의미입니다. 한 사람을 모독 했다면 인류를 모독한 것이요, 한 사람을 살해했다면 인류를 살해한 것과 같은것 입니다. 바로 이러한 나뭇잎 같은 나무들이 모인 숲에서 길잃은 기수가 빠져 나오려고 말을 몰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약간의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뭇잎같은 나무가모인 숲은 바람직한 숲 즉, 바람직한 길인데 제목이 길 잃은 기수라고 표현한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 잎 같은 나무들이 모인 곳이라면 대표적인 곳으로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종교생활 공동체 즉 "수도원" 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단체 속에서 규율에의한 구도의 길인데 바로 그러한 구도의 길에대한 부정적 시각의 표현인지. 그 리지 않아도 무방했을 그림을 작가가 상상의 충동을 제압하지 않고 그냥 그린 것인지 아무튼 아래 길 잃은 기수라는 작품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이든 아니든 마그리트의 표현 언어 상 바람직한 자(나뭇잎같은 나무)들이 모인 숲이 잘못온 길이라 볼수는 없는 것이므로.

 

Rene Magritte,

은혜의상태.

 

불구자(the cripple)라는 작품에서 보듯이 습관이란 다양합니다. 머리-이성/눈-시점 /입-언어/가슴-마음/귀-새겨들음 습관을 눌러 이기기란 둥근 곡선 위에서 자전거 중심을 잡는 것 처럼 어렵지요. 설상가상 으로 담배 연기까지 올라와 숨이 막힙니다. 목구멍에선 욕이 나옵니다. 뱉을까? 말까? 아벨과 카인 이라는 시에서 보들레르는 뱉었습니다. "하느님을 땅에 내어 던져라" 네오토미스트의 시에서 헤밍웨이도 뱉었습니다. "주 나의 목양자 내 그를 영원히 원치 않으리라" 그러나 마그리트는 말합니다. 은혜란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 힘든 상태를 견디는 능력 자체를 말하 는 것이라고... 정말 이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그래서 보들레르보다 헤밍웨이 보다도 마그리트를 더 좋아합니다.^^;;

 

Rene Magritte,

The Heartstring

 

이 제목은 직역을 하면 心琴이 되지만 "소망과 응답" 이라고 의역을 해야 쉬워집니다. 작품을 살펴보면 대지가 강에 의해 2개로 나눠져 있으며 좌측의 강을 건너(heraclitus's bridge-1935) 우측 벌판에 맑고 투명한 잔이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포도주 잔처럼 생겼습니다. 포도주는 기 독교에서는 성혈을 의미하며 그릇은 인간의 절대아로 의미 되기에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사람의 머리대신에 그릇이 그려진 작품들을 보게됩니다. 포도주=성혈=영원한 생명을 담고자 하늘을 향 해 맑고 투명한 의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잔=그릇=사람은 하늘도 감동하여 구름이 내려 앉는다 (결국 하늘과 만난다)는 뜻입니다. 저주라는 작품에서는 구름이 얼룩의 의미가되는데 이 작품 에서는 지상과 하늘을 오르내리는 전 령=성령의 의미가 됩니다. 결국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는 절대자와의 내적 체험과 성장의 내용들 이 심미적 이성에 의해 걸러져 예술로 형상화 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그리트 작품의 거의 모든 주제가 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므로 예술적 이론과 철학적 관념 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려는 책들이 대부분이며 그러한 방법으로는 작품 주위를 맴돌뿐 중심으 로의 접근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Rene Magritte,

The good omens

 

"좋은 예감" 이라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마그리트 작품이 타인을 의식하고(이해를 위하여) 그린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자신의 내면적인 심리나 종교성을 파악해야 하기에 해석이 어렵지만 이 작품은 약간 더 깊은 작가 개인의 내면적인 고백이라 해석이 조심 스럽지만 마그리트의 세계를 전 반적으로 봤을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지금은 작품을 볼수 없지만 예전에 magritte .com의 자료에 의하면 1946년작 sunrise 라는 작품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서 의역을할 경우 여러 제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암튼 "좋은 예감"이 상징화 된 단어가 "해돋이"가 될 수 있으니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화면을 관찰해보면 꼬리가 유난히 크고(날기엔 부자연 스럽고) 꽃다발로 치장한(축하와 존경을 많 이 받는) 새가(하늘과 관련된=마그리트 전 작품의 일관된 주제=종교) 해변(육지와 바다 사이=이쪽 과 저쪽 사이=종교와 신앙의 자리)을 날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좋은 예감=해돋이라는 제목 입니다. 꼬리에 꽃다발을 가득달고 부자연스럽게 나는 새의 뒤로 찬란한 햇살의 동이 떠오르는 그 림을 작가는 왜 인상파의 기법으로 행복을 표현하듯 화려한 그림을 그릴까요. 꽃다발을 꼬리에 달고있는 저 새를 마그리트가 비로소 넘어섰기 때문이 아닐까. 새의 의미를 더 관 찰하기 위해 우상(the idole)이라는 작품과 비교 해보면 구도가 비슷하며(=종교적 해석의 대상으로 서의 새)/ 꼬리가 유난히 큰 새(기형적) 이지만 소재가 돌은 아닌(완전한 우상은 아닌=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 점을 볼때 저 새는 제기능을 충분히 못하는 불완전한 기성의 제도적 종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를 넘어 마그리트가 발견한 떠오르는 해돋이=좋은예감 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며 그의 작품 기초 우주진화론(Elementary cosmogony)이라는 작품을 보게되면, 이 작품은 떼이야르 드 샤 르뎅의 신학사상과 유사한 진화론적 창조주의 의지이해 즉 신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마치신 것이 라기 보다는 창조중 이시라는 이해를 마그리트도 가지고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흔적으로서 마그리트는 인간의 영적 진화의 고통을 그렸으며 Perpetual motion (영원한 동작) 또한 영적 진화의 궁극적 모습을 그린 작품에 해당되는 작품으로서 . The last screen 최후의 은 막=영상=영감=깨우침(1967), La culture des ideas=The Cultivation of ideas 사고의 경작(1956) The new years 새시대(1942), The Art of Living살아있는예술(1967)이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Telescope

 

음.. 위의 해설이 꼭 백프로 정확하다고 볼 수 만은 없겠구요. 각 종교인마다 해석을 조금씩은 달리 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위의 해설들은 종교적 관점에서의 객관적인 해설이라기 보다는 르네마그리트 작가 자신의 신과 종교에 대한 생과 연결된 주관적 관점과 예술적의도 위주의 작품해설 이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그럼, 우주 초월적으로ㅋ 인간의 내면심리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는 창문시리즈 중 하나인 이 망원경 이라는 작품은 종교적으로는 과연 어떤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가 있을까요. 각자 입맛대로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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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미술관에 맨 처음 초대된 화가는 벨기에 태생의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9~1967)입니다. 이성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해, 현실은 아니나 현실을 뛰어넘는(sur-real) 리얼리티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공통의 목표였습니다.


초현실주의는 몰라도 요란한 흥행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달리와 아내 갈라와의 애증의 관계는 지금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요.


마그리트의 조용한 실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자극을 받은 바 큽니다. 그는 꿈의 본질을 분석해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꿈의 배후엔 꿈꾼 자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욕망을 비트는 건 이성입니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황당한 일들에도 논리가 흐르고 이성이 개입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사물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고리를 찾아 그림 속에 구현하려 애썼습니다. 

 

 

그 아래에는 벽난로가 있습니다. 앗! 그런데 벽난로 안에는 타고 있어야할 장작불 대신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벽을 뚫고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벽난로 속은 터널 같기도 합니다.


그 터널 속을 증기기관차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지금 막 달려 나오고 있는 중인 듯이 보입니다. 화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제게는 정지된 시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 듯이 보입니다.


시간은 흐른다 말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지난 시간을 오늘의 시점에서 흘렀다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우린 모르지요. 순간순간 정지된 현재들이 계속 이어져 시간을 구성하고 우린 그것을 관념의 세계에서만 느낄 뿐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 사이에서만 존재합니다. 즉 과거가 있음으로 해서 시간은 생겨나고 미래가 있기 때문에 시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앞을 향한 증기기관차의 질주를 가능케 하는 동력인 하얀 연기가 바로 그 질주 때문에 뒤를 향해 올라가듯이 말입니다.


벽난로 위의 시계는 12시 43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계의 시간이 12시 43분에 정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 시계의 바늘은 12시 43분 이전을 지나쳐 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곧 그 시간을 지나쳐 갈 것이라 확신할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지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화풍의 핵심은 <낯설게하기>입니다. 너무 많이 그려져 진부해지기까지 한 물건들을 이웃시켜 서로를 낯설게 함으로써 그들은 평범한 사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제 보게 되는 <이미지들의 배반>의 미학은 초현실보다 다다이즘(192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성행한 反 예술 운동)에 가깝습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마그리트의 속내는 무엇일까요?


그는 ‘당신이 파이프라고 믿고 있는 그림 속에 담배를 채울 수 있어?’라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이건 파이프가 아니야,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야!’하고 외칩니다.


마치 시니피앙(기표)와 시니피에(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인 한 언어공동체의 산물이고 한 기표의 의미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서 비롯될 뿐이라는 소쉬르의 언어학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파이프란 이미지 역시 자족적인 기호체계로서의 시니피앙을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같이도 들립니다. 


이름이 있기 전에 이미지가 있었고 이미지가 있기 전에 그 대상(사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걸린 그림은 <가짜 거울>입니다. 사람의 눈을 그린 그림에 가짜 거울이라니요? 수상한 생각이 얼핏 스칩니다. 자세히 보니 사람 눈의 홍채는 뭉게구름 떠 있는 푸른 하늘로 바뀌어 있고 까만 동공은 마치 태양처럼 그 하늘의 중앙에 걸리어 있습니다. 


'눈의 미학'의 저자 임철규 교수는 이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 말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것이 신을 닮고자 하는 욕망쯤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실패가 불을 보듯 뻔한 인간의 욕망에 아연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사물의 쓰임새보다는 그것의 교환가치, 즉 가짜가치에 얽매여 살고 있는 현대인의 욕망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빛의 제국>은 참으로 매혹적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위 <가짜 거울>의 냉소적인 쾌감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태양의 빛나는 하늘 아래의 야경이라니요?


대상을 마그리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참으로 경이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그리트는 현실을 뛰어넘어 논리의 저편에 있는 어떤 지점으로 나아갑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대상의 이면을 명철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눈길에서 저는 시원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낯선 대상이 어느새 제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가장 친근한 사물로 자리매김합니다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집합적 발명>은 세이렌 같은 인어이야기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을 한 순간에 조롱하며 발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대부분의 인어그림들이 하체가 물고기인데 반해 마그리트의 인어는 상체가 물고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비틀어 고정 관념을 뒤엎는 마그리트의 장기가 여지없이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지요. 그는 오브제의 합성이라는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성욕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요부의 얼굴을 한 인어그림들보다 여자의 생식기를 드러낸 물고기 그림은 인간의 성적 욕망과 그로 인한 타락의 뉘앙스를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줍니다.



화가이자 시인인 최영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유쾌한 농담 뒤에는 합리적인 세계에 대한, 지나치게 지적인 추상미술에 대한 반항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유 있는 반항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즐길 뿐입니다. 태양이 빛나는 하늘 아래의 밤을..... 수면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을....”   

  

                                                                               / 르네 마그리트

 

 

 

    01. Holiday                 
    02. Wind Of Change                 
    03. Still Loving You                 
    04. Always Somewhere                 
    05. Hurricane 2000                 
    06. Moment Of Glory                 
    07. You And I                 
    08. When The Smoke Is Going Down                 
    09. Wild Child                 
    10. Here In My Heart                 
    11. Since You've Been Gone                 
    12. An Ang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