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바쁜 일속에서 심신이 피폐해져가고 있을 즈음
울 동료들과 그 돌파구로 서울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오전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차 한대를 움직여
바삐바삐 서둘러 미술관 근처 성북초등학교 운동장에
파킹을 한 시각은 4시 30분...
폐장 시간 6시 안에 도착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요.
길이 밀릴까봐 얼마나 맘 조렸던지...
문을 연지 3일째여서 그런지 줄을 서서 입장하지는 않았지만
미술관 안에는 줄을 서서 천천히 움직여야 할 정도로
많은 관람객들이 문화의 향기에 젖어들고 있었어요.
일년에 5월과 10월 단 두 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간송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던 귀중한 문화재를
물려받은 자신의 사재를 모두 털어서 사 모은
호가 간송인 전형필님의 개인 미술관입니다.
나라에서도 문화재의 소중함을 인식 못했을 때인데
한 개인의 남다른 예지력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수준높은 조상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줍니다.
머리 숙여 그분께 고마움을 표하면서
국보를 지키신 훌륭한 한 분 덕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혜원의 미인도를 친견할 수 있었지요.
그것도 무료 개관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겁니다.
이번 전시는 풍속화대전으로
5월에 보름동안 열렸던 사군자대전에 이어
국보 12점과 보물 10점,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서화 등 진품을 전시했습니다.
개인 주택처럼 보이는 미술관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 자녀분들이 운영하고 있답니다.
안에 있는 보물의 가치보다
외양은 생각보다 낡고 수수했습니다.
잎을 떨굴 준비를 하고 있는 주변의 나무들을 닮았습니다.
가꾸지 않은 주변의 모습은
그냥 자연스러워서 더 친밀감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 입장료 받아서 잘 꾸며놓지.....'
하기도 했지만요.
뉴스보니까 말일 경에는
4시간 줄서서 보았다는 걸 감안하면 행운이었지요.
1층에 인파가 북적거려 안내에 따라 2층 전시실 관람을 하고
1층으로 왔더니 유난히 한 그림 앞에만 많은 관람객이 있어요.
바로 미인도 앞이였지요.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인도..
바람의 화원에서 미인도...
영화 미인도에서 보았던 미인도...
미인도’(45.5×114.0㎝)는 인물화 치곤 작지 않은
꽤 큰 족자였습니다.
그림 속 저 여인이 누구일까요?
당시엔 여인의 초상화가 드물었고
내외가 심했던 시절이었기에 저렇게 화가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점,
옷차림새가 그 시절 유행에 무척 충실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
아마 기생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답니다.
그림 왼편의 화제(畵題)로 보았을 때,
신윤복이 이 여인에게 사랑 또는
그 밖의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을 거라 짐작할 뿐이랍니다.
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
(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
아찔하게 얇은 가슴 속 온갖 정이 봄이 되었나니,
붓끝으로 능히 그 마음까지 그리노라.
그림에 마음까지 그려 넣었다니
그 마음 어떤 마음일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일까?
아니면 짝사랑의 아련함일까?
한올 한올 정교하게 그린 머리의 가채...
가채 사이에 삐져나온 뒷목의 잔머리까지
어찌도 저리 섬세하게 그렸을까나?
여인의 풍성한 치마 밑으로
버선발이 하나 나와있음을 왜 여태 나는 알지 못했을까요?
사진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던 것을 느끼고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았던을 새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미인도 앞에서 내가 그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30분 이상을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미소 지을 듯 말듯한 눈매며
팔이라도 살짝 들어올리면 풍성한 앞가슴이 살짝 보여
뭇 사내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을 배꼽티 수준의 저고리하며
쫄티처럼 쫙 달라붙게 입어 가슴 부위를 드러내고
대신 아래옷은 풍성하게 입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 부분의 움직임이 커보이도록
섹시미를 강조한 치마하며.....
신윤복(申潤福)의 월하정인(月下情人)
두번째로 날 사로잡은 그림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대중가요까지
영원한 주제는 사랑일 것입니다.
내 사랑은 물론 타인의 절절한 사랑을 엿보는 것도
꽤나 소소한 재미를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두번째 그림은 월하정인입니다.
달빛 아래서 만나는 정인...
그 설레임은 어떠할까요?
화제가 또 기가 막힙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월심심야삼경, 야인심사양인지)
달도 흐릿한 삼경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초승달이 뜬 밤이라 그렇잖아도 어두운데,
야심한 삼경(밤 11시~새벽 1시)에
은밀히 만나는 남녀라...
대체 어떤 사연을 가진 정인들이기에,
어떻게 해서 저 밤에 만나게 되었는지요?
난 알 수가 없습니다.
화제에 나온 그대로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 뿐이겠지요.
소설 '바람의 화원' 의 원작에서도 이 시가 나옵니다.
窓外三更細雨時 (창외삼경세우시)
兩人心事兩人知 (양인심사양인지)
歡情未洽天將曉 (환정미흡천장효)
更把羅衫問後期 (경파라삼문후기)
창 밖은 야삼경 부슬비 내리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기뻐하는 마음 미흡한데 하늘이 밝아지려 하니
나삼자락 부여잡고 훗날의 약속을 묻네.
이들의 절절한 사랑을 어찌합니까?
월하정인 속 정인들은 초승달 아래 만나는데,
이쪽은 서글프게도 부슬비까지 내립니다.
만남의 기쁨을 채 나누지도 못했는데
날이 밝아오고 있으니
서로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우리 언제 또 만나요?'
만날 수나 있으련지...
참으로 안타까운 이별입니다.
세번째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그림 설명에 의하면
“넋나간 선비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듯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길섶 한곁으로 몰아 놓고
선비 일행을 큰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하늘로 비워 둔 대담한 구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왼쪽 상단에 있는 시는
단원과 동갑내기 그림 친구인 이인문이 썼다고 합니다.
아리따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귤 한 쌍이 놓인 듯하다.
어지러운 금북(베짜는 도구)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 비섞어 봄강을 짜낸다.
어쩜 이리도 멋진 시를 지어낼 수 있었을까요?
새싹이 돋아나고
꽃은 여기 저기서 피어오르고
새들도 봄에 취해 어찌할 바를 모르니
길을 가는 선비도 바람이 들겠지요.
그림을 그리는 단원도
春心 때문에
여백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외에 많은 크고 작은 작품들...
친절하게 이쁜 한글체로
화제를 풀어서 써놓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자를 읽으려
짧은 가방끈 모두 동원해야 하는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그 은유적인 화제를 보고 있자니
훌륭한 시 몇 수 읊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때는
자연을 대할 때와
예술을 만날 때가 아닐까요?
내년 봄 간송미술관 개관일을 기다리며...
다시 만날 혜원을 기다리며...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지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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