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친구들, 목화의 성에서 온천을 즐기다.

올레리나J 2011. 8. 9. 11:53
안탈리아는 터키 남서부 안탈리아 만 연안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 도시이이자 휴양도시다.
옛 이름은 아탈리아.
해발 35m의 석회석 지반위에 세워진 안탈리아는
'여러 종족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팜필리아 지역의 도시로
팜필리아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세워졌다.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안탈리아는 기원전 150년 경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해군기지로 쓰기 위해 항구를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아탈리아로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33년에는 그의 후계자 아탈루스 3세가
자신의 사후에 이 도시를 로마에 넘겨주라는 유언을 남겨
이때부터 안탈리아는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하에서 안탈리아는
제국의 주요 항구 도시가 되었으며
중세에도 비잔틴 제국의 국방을 담당하는 중요 도시였다.
11세기 들어 셀주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현재 터키)로
몰려 들기 시작했고
1207년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셀주크족에게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이때부터 안탈리아)
1391년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에 점령 당했다가,
다시 몽골의 티무르에게 점령당했고
15세기 후반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분할되면서 안탈리아는
1918년부터 1921년 사이 이탈리아에 점령당했으나
곧 터키가 되찾았다.
특히 안탈리아는 기독교가 일찍 전해진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티오크로 떠나는 배를
이곳에서 탔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팜필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페르게)에서 전하고
앗달리아(안탈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안티오크)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사도행전 24 - 26절)

뒤로는 토로스 산맥이, 앞으로는 지중해가 펼쳐진 이 도시는
인구 약 800만명으로
프로축구 클럽들의 전지훈련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어제 물놀이로 통잠을 자고 난 뒤에 오는
상쾌한 아침...
호텔 만족도가 최상답게 음식도 최고다.
오늘은 최고의 건강식으로 신체리듬을 잘 챙겨보자고....
수영장이 보이는 호텔 야외로 나와
떠오르는 지중해의 햇빛을 맞으며 우아하게 조식을 즐긴다.






호텔에서 버스 타기 전 사진놀이..











오늘 우리들은 어떤 세계로 떠나게 될까?
아침은 항상 기대와 설레임의 반복이다.



버스타고 가면서 지중해를 다시 담아본다.























지중해에서의 뱃놀이.....오전의 하일라이트!



유람선 타는 입구







유람선 타러 가는 길목에
작고 이쁜 가게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러웠다.
타이타닉 포즈도 취해보고...
1시간 가량 물빛, 하늘빛을 즐긴다.







































중세의 성채가 남아 있는 마리나 항구







1년에 9개월 동안 수영이 가능한 태양의 도시 안탈리아.
아침 나절이지만 이미 날씨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지중해 연안이라 습도가 높아
물 속의 풍덩~ 뛰어들고 싶다.







2세기부터 안탈리아를 기점으로
지중해를 오가던 배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정거장 역할을 했던 마리나 항구

지금은 콘얄트 해변 쪽에 새로운 항구가 생겨
항구로서의 기능은 줄어 들었지만,
여전히 안탈리아의 명소라고...
투어를 권하는 사설 보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케시크 미나레(탑)
터키의 사원이나 교회의 역사가 그러하듯
이 곳도 2세기에 처음 건립될 때는 사원으로 사용되다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고
셀주크 투르크 시대에는 자미로 개조된 곳
1361년 다시 교회로,
15세기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 다시 자미로 바뀐 곳

정복자가 바뀔 때마다 허물지 않고
용도만 바꾸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나마 오랜 역사의 굴곡을 견딜 수 있었을 터...



이 미나레가 케시크 미나레로 불리운 이유는
1896년까지 자미로 사용되다
큰 화재를 겪으며 미나레 윗부분이 소실되어 잘렸다고 ....







칼레이치 구시가지















골목이 심심찮게 재미있다.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작은 샵
그리고 여행자 숙소에 딸린 근사한 수영장도 보인다.







<<하드리아누스 문>>
130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문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메인 게이트로 사용되었는데,
지금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3개의 멋진 아치가 인상적이며
이것 때문에 위츠 카플라르(3개의 문이라는 뜻)으로 불린다,







아치 위쪽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들이 부조 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 윗쪽의 아름다운 조각들...











안탈리아 신시가지











트램



이블리 미나레
안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38m의 붉은 미나레
미나레 외벽에 붉은 벽돌로
여덟 줄의 세로 홈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13세기 룸 셀주크의 술탄이었던
알라딘 케이쿠바드 1세가 세운 것이라고.



주차장 가는 길 공원 여기저기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모습이 펼쳐진다.
아이들의 동상인데 어쩜~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
터키는 돌궐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반도에 정착한 나라다.
돌궐족은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 언어를 사용하고
많은 부분에서 한국과 비슷한 문화가 지금껏 전해진다고 한다.



구슬치기























다시 버스를 타고 현지식당에 왔다.



야채로 가득한 중식







6달러 짜리 아이스크림을 맛보다.






이 지방은 면제품이 유명하단다.
면으로 만든 이불, 티, 스카프 등등
내가 두르고 있는 스카프가 3만원 정도인데 여름용이다.
비싸다고 사지 않았는데 살 걸....
실크는 여름에 하기엔 너무 더워...







현재 기온 36도..남쪽이라 습하다.
많이 덥다.
작년 동유럽 갔을 땐 시원하다 못해 추웠는데...
우리 나라와 위도가 같은 터키는 날씨조차 비슷하다.







파묵칼레의 석회층 위쪽에는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자리하고 있다.
성스런 도시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
한때 인구가 10만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던 이곳은
찬란했던 그때의 추억만 쓸쓸히 떠돌고
이제 페허만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의 왕국 에우메네스 2세가 건설한 도시로
에페스, 베르가마 등 같은 시대의 대도시가
대부분 해안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히에라폴리스는 내륙에 건설되었는데
그 이유는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의 치료와 휴양이 목적이었다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며 번영했는데,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축제,
스포츠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원형극장, 도서관 등이 건립되면서,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주목받았던 곳.



12세기 셀주크 투르크가 이 곳을 점령한 뒤
이름을 파묵칼레로 바꾸었지만,
대도시의 명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히에라폴리스의 번영은 1
354년 이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87년 독일 고고학 팀의 발굴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이라고.











반라의 여인들과 남정네들이 아무 꺼리낌없이 돌아다닌다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고
지나가면서 살짝 티나지 않게,
무심히 셔터를 눌러 이런 사진을 얻는다.







잃어버린 도시..묻혀버린 도시...에도 꽃은 핀다.



고고학 박물관
히에라폴리스에서 출토된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으로
주로 2-3세기의 로마시대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



































저 끝에 까지 가봐야 하는데
오후 3시 무렵의 태양은
너무 살인적이이이서 유적지 보다는 옆에 보이는 하얀 물쪽으로 자꾸 발걸음이 향한다.






























36도의 습한 햇빛을 피해
인적이 드문 그늘을 찾아왔다.
족욕을 할 수 있도록 온천물을 받아 놓은 곳인데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다.
한참을 쉬다가 오늘 오후의 하일라이트인
자연이 만들어 놓은 위대한 선물을 구경하러 간다.































파묵칼레의 석회층 위쪽에서 본 시골마을인 파묵칼레와 석회층의 모습



고대로부터 화산 폭발과 지진이 많았던 터키는
약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온천이 산재하고 있다
로마시대부터 발전했던 목욕 문화가 이어져
역사 깊고 물 좋은 온천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파묵칼레는
터키 최고의 비경과 수질을 자랑하는 온천유적다.
우리 나라의 퇴폐문화의 대표격이던 터키탕은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집트 클레오파트라가 다녀갔다고 전해질 만큼
유구한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이 곳
당시 목욕탕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다음 편 에페소에서..)
하지만 지난 세기에 관광지로 본격 개발되면서
인근 호텔들이 너무 많은 온천수를 뽑아 쓴 탓에
산등성이에 흘러 넘쳐나던 온천수는 점점 고갈되어 가고...
그래서 지금의 관광객들은 안타깝게도
졸졸거리는 흐르는 미지근한 물에
발 한번 담그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파묵칼레는 가볼 만한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눈에 들어오는 정경만으로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니까.
누가 선정하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곳임에 나도 찬성!







연구에 따르면 석회층은 현재 약 4.9 제곱 킬로미터를 뒤덮고 있으며,
매년 1mm 씩 증가한다고 한다.
현재의 두께로 연산해 보면 석회층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1만 4000년 정도라고
자연의 위대함에 또 한 번 감탄!







물은 칼슘과 이산화탄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카펫과 비단을 직조할 때 표백제로 쓰인단다.















3



마치 목화솜이 만들어낸 성과 같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가 되었다고



파묵칼레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석회층 가운데에 자리한 연못의 모습도 보인다.
수로에서 보낸 물이 모여
흰색과 대비되는 옥색의 물빛도 보인다.
오늘 저녁 저 아랫마을 근처에서 잠을 잔다.



















흐~음..그림 좋고...넘 고맙다....



















흐르는 물결따라 오랜 세월 새긴 흔적.....
마치 바닷가의 파도가 지나가고 난 자리처럼 느껴지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미끄러질라 살살 걷는다.
바닥이 온통 흰색일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바닥도 있다.















그늘에서 쉬는데 젊은 남녀의 그림이
내 프레임에 잡힌다
남자는 여자의 무릎에서 단잠을 즐기고
여자는 아이를 돌보듯 얼굴을 쓰다듬고...
개팔자 상팔자라더니..고요하다.







호텔이 리조트 같다.
지중해의 이국적인 나무숲이 싱그럽다.







호텔 수영장



수영장 위가 노천 온천이다.







수영장에서 우리들의 한바탕 웃음소리가
파묵칼레를 뒤흔들었을 게다.
이야기는 나중에 에피소드에서...



수영장 위 온천







저녁 후 노천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칸칸이 물 온도가 다르다
위로 올라갈수록 뜨겁다.
바가에 부드러운 진흙이 밣힌다
손으로 한웅큼 쥐어 얼굴에 바른다.







뿜어져 나오는 온천수







2층 식당 가는 길



저녁










온천에서 피로를 풀고 수영장에서 소화시킨 후
맥주 한 잔하러 호텔 야외 바에 왔다.
더워서 지친 피로가 싹 가신 몸은
지중해의 살랑바람에 날아갈 듯 가벼웠다.
게임 후 벌금으로 에페스 한잔씩...
맥주 맛을 잘 모르는 나도 에페스 만큼은 절로 넘어간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밤은 영업이 끝나는 자정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