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창동 감독의 다섯번째 작품인 <시>에서 이창동 감독이
"본명이 손미자 인 윤정희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라고 밝혔듯이,
배우 윤정희는 60이 넘어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간병인을 하며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키우고 어렵게 사나
꿈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노인 양미자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주인공 양미자는 한강이 흐르는
아름다우나 작은 소도시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키우며
난생처음 '시'를 배우기위해 동내 문화원을 찾고,
김용택 선생님(김용택 시인 분)으로부터
" '시'가 죽어가는 시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듣고 "
'시'는 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시상'을 찾아야 하며
가슴에서 '시상'이 날아오를 때 '시'를 쓸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쓰기위해 주변을 본다.
양미자는 우연히 다리에서 투신한 소녀 이야기를 듣고
울부짖는 소녀의 어머니를 목격하게 되고,
중학생인 손자와 친구들이 소녀의 죽음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것을 알게 된 양미자,
강에 투신한 소녀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고
고민하는 양미자, 손자의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양미자,
반신불수 노인을 일주일에 두번
간병하는 양미자,
문화원에 다니며 '시를 쓰려하는 양미자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처럼 기록해 나간다.
양미자의 일상을 기록하는 화면은 너무나 이름답다.
아름다운 강, 억새가 우거진 강가길,
흐르는 냇물, 빨갛게 피어있는 맨드라미,
아파트앞의 커다란 나무,
다리밑에서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앉아있는 모습,
하얀 모자,
핑크빛 브라우스, 꽃술이 달린 하늘색 치마 등등...
배우 윤정희는 죽음을 앞둔 나이에
꿈을 잊지 않고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홀로 손자를 꿋꿋이 키우는 양미자,
주름살이 가득하나 아직도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은 순진하고
소녀같은 철부지 노인 양미자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아름다운 다큐멘터리 같은 양미자의 일상에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시'강좌가 끝나는 날,
<아네스의 노래>라는 한편의 '시'를 완성하고 아름다운
선택을 하는 양미자를 그린다.
이창동 감독은 시 <아네스의 노래>가 의 메세지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아네스라는 사연이 있는 성녀 이름이 생각나서 이름지었다.
특별하게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일상의 삶에 안도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도덕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생각하고 싶었다"며
사는것이 무엇인지?
묻는 영화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했다.
영화는 무심한 일상과 도덕성의 연결을 이야기하지만,
한편, 보고, 느끼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감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것을 잃어바린 사람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떠나는 순간이며, 다음 생을 꿈꾼다'는
내용을 담은 미자의 '시'와 마지막 장면,
무심하게 콸콸 흘러내리는 강물이 인상적이다.
영화 '시' 가 던져 준 메시지
시 쓰기의 기쁨 그리고 시 쓰기의 아픔
영화는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강물 위로 둥실 뜬 채 떠내려 오는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으로 오프닝을 엽니다.
경기도 소도시의 어느 낡고 작은 서민아파트.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를 돌보며 사는
미자(윤정희 분)는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소녀 같은 심성의 할머니.
생활보호대상자이지만 동네 슈퍼 강노인(김희라)의 간병인으로
푼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며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의 시 강좌 포스터를 보고 한걸음에 찾아가 등록을 합니다.
소싯적부터 꿈꿔 온 시 쓰기에 마음이 들뜬 그녀에게
세상은 마치 해맑은 봄비를 맞은 뒤 무지갯빛 영롱한 빗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한 송이 꽃과 같이 싱그럽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즈음 마을 다리 위에서 여중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은밀하게 회자됩니다.
소녀의 어머니가 맨발로 산발한 채
도심 한 복판에서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런데 미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 사건이
그녀의 일상에 상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키고,
영화는 내리막을 향해 무섭게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지없이 평화로운 삶의 풍경을 노래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시를 쓰는 여자에게
눈앞에 보이는 일상은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몹쓸 짓'에 부딪쳐 아파하고
소리 없이 통곡하다 마침내 삶의 자리와 맞바꾼
그 자리에 시의 꽃을 피우는
한 편의 시 같은 영화, <시>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는 죽어도 싸!"
영화는 단 한곡의 음악도 틀지 않습니다.
자동차 소리와 강물 소리만이
더운 햇살을 식히는 바람소리를 따라 간결하게 귓가를 스칩니다.
대신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창을 열어 놓은 미자의 숨결과 발길과 눈길이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한 생명을 등치시켜 맞바꾸려 작심한 듯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막상 시 쓰기는 고통의 과정입니다.
김용택 시인을 통해 시작(詩作)을 듣고 배우지만 까마득합니다.
치매로 인해 기억이 깜박하는 데다,
아마추어 시 낭송회에서는 형사라는 인간이
"샤워를 다섯 단계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며
"샤워-누워-세워-끼워-고마워"라고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이나 쏟아 냅니다.
낭송회 뒤풀이에 참석한 김용택 시인의 후배라는 이는 얼큰하게 취해
"씨팔, 시는 죽어도 싸!"하며 악을 씁니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시를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아, 이제 진짜 시인조차 부패한 시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이 엄혹한 현실에서 그녀의 시 쓰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바르르 떨리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떨림 뒤켠에는 어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여중생을 성폭행한 6명의 남학생 중에 낀 손자는
'몹쓸 짓'을 하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고 먹고 게임하고,
가해 학생의 부모들과 교감선생님은 위자료 3천만 원으로
없었던 일로 치자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타협할 수 없고 타협해서도 안 되는 부도덕의 세계와
그 속의 뻔뻔한 인간 군상들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그녀를 습격합니다.
식당 마당에 앉아 꺽꺽 울음을 토해내던 미자는
시의 죽음에 절망하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듯이
그렇게 생애 마지막 시를
한 줄 한 줄 완성해 나갑니다.
<시>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에서 피는 꽃
인간 내면에 켜켜이 쌓인 삶의 무게와 색깔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스크린에 투영 시켰던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에 비해
이번 <시>에서는 고통의 밀도를 낮췄습니다.
하지만 잔잔한 고통의 파문이 주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는
한 겹 더 밀도 있게 스며듭니다.
그것은 시와 생명을 맞바꾸는 미자를 통해
감독이 탐구하려고 했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가치'가 주는
'존재의 무거움' 때문입니다.
돈과 실용과 토목개발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은 악다구니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귀결시킵니다.
여중생의 생명을 놓고
3천만 원의 효용과 흥정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서도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미자의 시 쓰기는
시가 죽어 가는 시대의 현실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반면에 하잘것없어 보였던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 줍니다.
마치 시란,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피는 한 송이 꽃에 다름 아니라는 듯이.
이를테면,
그녀가 가해 학생 부모의 협상 대표로
등 떠밀려 딸을 잃은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막상 자연의 아름다움만 얘기하고 돌아서는 장면은
치매로 인해 절박한 현실을 망각하면서도
동시에 시심에 취한 상반된 두 모습을 대비시키며,
과연 사람의 삶의 색깔은 무엇인지
처연한 질문을 던집니다.
반면에 그에 대한 해답은 처절합니다.
손자의 합의금을 벌기 위해 강 노인에게 비아그라를 먹이고
합궁을 하면서도
꽃과 나무, 바람을 응시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여자(美子)'는
시궁창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순수함으로
마침내 시를 완성하고 그리고 다리 위에 섭니다.
그 다리는 자신의 손자가 성폭행해 자살한
소녀가 뛰어 내린 바로 그 다리입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는 그녀의 마지막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관객들에게 그녀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무언의 목격자가 되길 요구합니다.
물욕의 화신과 내재화된 폭력이 주인인양 행세하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와
우리들은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을.
그래 설까요.
극장 문을 나선 뒤에도
그녀의 잔상이 오래도록 거둬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잔상에는 수많은 여백과 쉼표,
물음표가 촘촘하게 배어 있습니다.
관객들 각자가 어떤 눈으로 <시>를 대면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이며,
거기에 부응이라도 하듯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의 미를 유지하며 마침표를 찍습니다.
영화란 그런 것이며,
시란 더욱 더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
미자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시
'아네스의 노래'를 꽃다발과 함께 문화원에 남겨둡니다.
문제는 그녀가 남긴 시가 일 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바보 노무현에 빗대어도 모자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의 흐름을 일 년 전으로 옮기고 미자를 노무현으로 바꿔 읽어도
억지스럽지 않을 정도로
<시>는 노무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가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에서 거둔 한 편의 시가
노무현이 마지막 남긴 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미자가 죽은 소녀와 그녀의 엄마,
손자와 가해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다 안고 다리 위에 섰듯이,
노무현이 주위의 고통을 안고 심지어 검찰과 조중동까지 안고
부엉이 바위 위에 선 모습이 겹쳐져 왔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김용택 시인이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시를 쓰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시를 써 내려 가야 할까요?
시 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에 미자처럼
생명을 걸고 시를 쓸 수 있는 순수도, 용기도, 처절함도
잃어버린 우리에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김용택 시인의 조근조근한 낭송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강물 위에 비친 우리들의 심장을 향해
<시>가 소리 없이 파고들며 조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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