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신라)으로 나를 위해 소식 전하리
혜초 / 왕오천축국전
# 1
혜초(704~787)는 16세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19세에 중국 광저우를 출발,
파라사국(인도네시아)을 거쳐 천축(인도)으로 건너가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했다.
천축으로 갈 때는 바닷길,
사망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산인데, 가련하구나.
힘써 올라가는 유사들이여.
몇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적었다.
혜초 전후로 수많은 신라 유학승이
천축행에 도전했으나
# 2
'왕오천축국전'에 있는
고향 서라벌을 그리워하며 쓴
"그대는 서역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어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는 아득히 높고
골짜기엔 도적도 많은데
나는 새도 놀라는 가파른 절벽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는 건너기 힘들다네
평생에 울어본 기억이 없건만
오늘따라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네"
# 3
혜초는 승려이기에 앞서 대여행가이자
인류 문명탐험가이자 시인이다.
마르코폴로에게는 동행할 지원부대가 있었으나
혜초는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혼자서 탐험과 고행을 치렀으니
어찌 마르코폴로와 비교될 수 있겠나?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 여행기',
'동유기' 등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불리지만
그 중 으뜸은 '왕오천축국전'이라 한다.
# 4
1908년 2월.
프랑스의 젊은 동양학자 폴 펠리오(1862~1943)가
이곳 둔황 석굴에서
6천여 종의 문서를 강탈해 프랑스로 가져간다.
그 중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알 수 없는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 한 권!
그것이 바로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었던 것이다.
# 5
'왕오천축국전'임을 확인하였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임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에 의하여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비로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에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나라 학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 6
독일어 번역을 한 발터 폭스는
"인도, 아프가니스탄,
동로마 제국 및 러시아 일대를 순례한 혜초는
마르코 폴로에 500년 앞서
비단길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혜초의 순례길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왕오천축국전'에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방향, 머문 지역의 지배자와
언어, 관습, 풍토, 왕이 소유한 코끼리, 종교,
서정적 느낌의 시까지 기록돼 있어
바야흐로 혜초는 시인이자
동,서양 문명의 기록자요, 전달자요,
인류문명 교류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개척자였던 것이다.
# 7
한때 번성하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신비로운 명사산 월아천이 알려지고
번성하는 도시로 발돋움하며
자연이 만든 위대한 보물 명사산 월아천을 비춰줄 해가,
인간이 만든 위대한 유산 돈황석굴을 비춰줄 해가 뜬다.
# 8
# 9
# 10
돈황의 상징은 비천상이다.
비천상은 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오다
실크로드의 교통 요지인 이곳 돈황에서 잠시 쉬다가
서안을 거쳐 고구려,백제, 신라까지 건너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상원사 동종 등에 새겨지니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문화교류의 찬란한 장이었던 것이다.
# 11
에밀레종의 비천상
# 12
상원사 동종 비천상
# 13
악기를 든 현대판 비천상
# 14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소림사가 있는 용문석굴,
서안 옆 대동에 있는 윈강석굴이다.
그 중 돈황석굴이 모든면에서 가장 가치가 높다고 한다.
# 15
# 16
# 17
# 18
구글어스로 본 명사산의
월아천 옆 돈황석굴(막고굴)
# 19
오아시스 도시의 상징 백양나무
# 14
막고굴의 벌집같은 굴들이 보인다.
# 15
# 16
# 17
# 18
# 19
# 20
# 21
비천상 따라잡기
# 22
막고굴은 남북 1,680m의 석굴군으로
전부 700여개의 동굴로 돼 있으며,
그 중 채색 인물상과 벽화가 있는 것은
492개굴이고
인물상 2,000여개,
벽화 45,000㎡가 있다.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23
실크로드를 따라 왕래하는 대상무역이
돈황에서 크게 번성하였고,
중국인들은 비단무역으로 축적한 부(富)로
무역 길의 안위와
장사의 발복을 염원하면서
1700여년 전인 서기 366년,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조에
승려 악준(樂樽)이 명사산에서 이상한 빛을 보고
석벽을 파서
인도식 석굴사원을 짓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로 북양, 북주, 수, 당, 송, 서하,
그 주인이 바뀌면서 무려 천여년 동안...
증축 개축 신축을 하면서
거대한 불교문화의 진수를 이룬 것이다.
# 24
막고굴은 사막 높은 곳에 있는 석굴이란 뜻인데,
당시 '막(莫)'이라는 한자는 사막의 '막(漠)'자로도 통용되었고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이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다
막고굴은 일명 '돈황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 25
굴의 크기도 각기 다양하다.
화려한 굴이 있는가하면
수수한 굴도 있다.
불상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크다고 불심이 깊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 얕은 것이 아닐진대..
부자도 가난한 불자도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은 같을지니....
# 26
사실 막고굴 내부는
카메라 휴대 금지, 사진 촬영 금지여서
사진으로 남기질 못했으나
한마디로 극채색화(極彩色化)된 벽화와
무수한 소상(塑像)으로 채워진
'정토(淨土)의 세계'그 자체였다.
불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불모의 사막에 이런 대화랑을 만들었겠는가?
# 27
현재 700여 개의 남아있는 석굴에
벽화(壁畵)와 소상이 잔존하는 492개의 굴은
고유번호를 붙여 관리되고 있있으며
막고굴의 전문 가이드인 조선족 아저씨는
한손엔 열쇠꾸러미
한손엔 후레시를 들고 다니며
출입이 허가된 몇개의 굴에 들어가
설명을 해주고 문을 잠그고
또 옆굴로 이동하여 설명하고...
# 28
이 석굴들은 당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나라 때 불상을 수리하면서 불상에 색이 입혀졌다.
돈황은 조각이 불가능한 사암투성이어서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흙을 발라 채색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흙으로 만든 조각들이 오래 보존된 이유는
이 곳이 사막으로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많아서이기 때문이다.
# 29
여기 막고굴에서
우리 나라 해동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13개여의 굴에서 지금까지 38명 정도 찾아냈다고 한다.
# 30
무슨 근거로 우리 나라 고대인이라 하는가 ?
휴대하고 있는 악기와 복식을 그 근거로 삼는다.
조우관(鳥羽冠-새의 깃털을 꽂은 머리장식)이나
조미관(鳥尾冠-새의 꼬리털을 장식한 모자),
혹은 넓은 소매깃을 가지고 있거나,
소매깃을 한 번 접어넣은 옷과
우리의 고유의 악기도
한반도인 임을 말해준다고...
# 31
492개의 막고굴 중
가장 관심있는 곳은
17호굴이다.
이곳에서 5만여권의 경전이 나오니
그 별칭이 장경동(藏經洞)이다.
17호굴 장경동에서
혜초가 쓴 감성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오랜 잠을 깨고
프랑스 약탈자인 펠리오의 손에 의해
프랑스로 갔던 것이다.
# 32
# 33
막고굴에는 일반에 공개돼 있는 남굴와
관람이 금지된 북굴이 있다.
남굴은 모두 화려한 벽화로 장식돼 있으나
북굴에는 250여개의 석굴이 있고
벽화는 없다.
# 34
북굴은 오랜 세월 묻혀있다가
최근에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며
돈황 석굴에 살았던 승려들의
수행과 생활 공간이었다고 한다.
벽화를 제작하는 화가 등 막고굴을 지탱해 온
이름도 없는 자들의 인생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 35
당나라 시대 막고굴은
최대의 전성기였고 막고굴의 최고 걸작은
동양의 모나리자 '선정불'벽화다.
장신구나 관은
금가루를 옻으로 여러 번 칠해 입체감을 줬다.
보살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자애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다.
그 화려한 벽화는
북굴에서 발련된 '문초'와 같은
하급 병사의 절규 위에서 꽃을 피웠다.
최전성기 당대에 돈황은 부 그 자체였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농민들이 징병되었고
서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 36
문서에 남아 있는 그들의 외침을 들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런 것이 군인이 되는 것이다.
전쟁이 있으면 그곳으로 향하고
운이 나쁘면 이 세상과 안녕
가족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너무나 고통스런 이 인생
극락정토가 마음을 받들어 주고
다음 세상에는 행복해지길...
빈곤도 병역도 없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싶다.
전쟁은 길고 고향은 멀다.
가족으로부터 연락도 없다.
나의 슬픔은 깊고
눈물은 어느 새 접시 위를 흐른다."
# 37
돈황 사람들에게는 막고굴은 부처가 사는 곳
즉 극락으로 가는 입구였다.
30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은 '문초' 처럼
가혹했던 이 시절
"10살 봄에 연꽃은 피고 부모님의 자랑스런 남자아이
20살 말타고 놀며 서쪽으로 동쪽으로 고통을 모르던 날들
30살 훌륭하게 배워서 누구와도 친하고
40살 슬슬 내리막길 마음 통하는 이 없고 노후만 걱정될 뿐
50살 일도 힘들어져 희망은 없고 거울에 비친 백발 뿐
100살 저 세상으로의 여행,
거짓없는 이 목숨 죽고나면 흙무덤..."
# 38
# 39
# 40
# 41
# 42
# 43
막고굴 지하에는 약탈자들이 가져갈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하고 육중한 대불과 와불상이 감동을 준다.
# 44
# 45
# 46
# 47
막고굴 입구 기념품 샵에는
비천 관련 액자와 족자
돈황 관련 책, 스카프 등이 있다.
# 48
# 49
# 50
# 51
# 52
# 53
# 54
막고굴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관을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서 막고굴 5적(내가 붙인 닉네임)을 만났다.
오른쪽 아래 해맑게 웃고 있는 이가
중앙아시아를 수면으로 떠오르게 만든자
스웨덴의 스벤 헤딘을 선두로 ,
본국에서는 탐험가이자 고고학자라는 신분으로
실크로드에서는 약탈자로 낙인 찍힌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
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
프랑스의 폴 펠리오,
러시아의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미국의 랭던 워너 그리고
일본의 오타니까지
이들은 차례대로 실크로드의 귀중한 유물들을 빼갔다
# 55
스웨덴의 스벤 헤딘은
돈황보물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었다.
1899년 그가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 동쪽
로프노르 사막을 건너다 마주친 곳은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독립을 유지하다가 4세기쯤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누란 왕국의 폐허를 발견하여 목간(나무로 된 편지) 120편과
융단 조각 등을 챙겨 돌아갔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1500년보다 훨씬 전에
이 고대도시의 마지막 거주자가
집을 떠나던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나마 누란왕국을 발견한 자라서 오적에서 빼준다.
# 56
제 1 적~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아우렐 스타인이었다.
스타인은 단단위리크, 니야와 누란을 돌며 유물을 수집해 갔다.
# 57
제 2적~ 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
그는 1904년 고창고성에서 한탕 유물 잔치를 했다
그는 벽화를 떼어 독일로 가져갔고
이 벽화들은 세계대전으로 모두 파괴되고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불상 만드는 방법)
# 58
제 3적~ 1907년 3월 영국의 스타인
둔황석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왕원록이
한 동굴 벽 뒤에서(장경동)
엄청난 분량의 고문서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돈황에 도착했다.
스타인은 중국의 고승 현장법사를 존경하는
제자로 위장해 왕원록의 환심을 샀다.
왕원록은 여느 외국인과 다른 그의 공손한 태도에 감복했고
며칠 뒤 스타인에게 유물 관찰을 허락했다.
스타인은 왕 도사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자신의 텐트로 유물을 가져와 관찰하다가
결국은 손상되지 않은 7천여 종의 문서와
일부만 남아 있던 5천여 종의 문서를 싸서
둔황을 탈출했다.
나중에 목록을 만드는 데만
반세기가 걸린 방대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스타인이 둔황석굴 복원 기금조로
왕원록에게 쥐어준 돈은 130파운드였다.
(막고굴 벽화의 채색 원료는 자연에서 채취
푸른색을 내려면 푸른색 돌에서 채취하고,
붉은 색을 내려면 붉은색 돌에서 채취함)
# 59
제 4 적 ~ 프랑스인 폴 펠리오
그는 스타인이 대박을 터뜨린 지 1년 만에
동양의 왜소한 승려(왕원록) 앞에 나타나
6천여 종의 문서를 챙겼다.
(이 문서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포함)
스타인이 휩쓸고 간 뒤라
이삭줍기에 그칠까 걱정했지만
진품들이 널려있자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왕도사를 현혹하여
90파운드를 주고 싹쓸어 갔다.
'실크로드 돈황학'을 연구하려면 중국이 아닌
프랑스로 가야한다는 우스개소리를 할 만큼......
# 60
제 5 적~ 일본 오타니
오타니 탐험대는 1902년 9월부터 1914년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서구의 유물 약탈자들이 저질렀던 방법 그대로
벽화를 뜯고, 무덤을 파헤치고,
소장 유물들을 톤 단위로 실어 본국으로 빼돌렸다.
(위 사진을 보시라)
그렇게 수집된 오타니 탐험대의 유물들을
'오타니 컬렉션'이라 부른다,
오타니고즈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니시혼간지(東西本願寺) 의 22대 주지로
절이 몰락하자
그의 컬렉션들은 재벌 구하라에게 넘어가고
구하라는 조선의 광산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당시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에게 기증한다.
이것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 전시관에 보관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에,
비슷한 양으로 찢어졌다.
실크로드가 그리울 때
용산국립박물관에 한 번 가봐야겠다.
(벽화를 만드는 과정)
# 61
그외에도
러시아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와
미국인 랭던 워너가 약탈자 명단에 올라 있다.
중동 쿰란동굴의 사해문서(구약성경) 발견과 비견되는
둔황석굴 17호는 이런 식으로 바닥을 드러냈고,
참혹한 약탈의 흔적을 직접 경험한다.
# 62
# 63
# 64
점심 식사
# 65
돈황박물관
# 66
# 67
# 68
# 69
# 70
내가 제일 맘에 들어했던 공간
여기서 남편과 김샘과 함께 사진놀이 삼매경
# 71
# 72
# 73
# 74
# 75
# 76
# 77
이런 박물관은 처음이다.
박물관 중앙의 매점에선
각종 기념품을 팔며
심지어 옷도 팔고 있다.
박물관 곳곳에 안락한 의자가 있어
또 무료로 차와 음료수도 제공된다.
# 78
# 79
# 80
신분증을 만들어 볼 수 있는 현대식 부스도 있다.
시원한 실내에서 모처럼 즐겨보는 력셔리함으로
미소가 번진다.
# 81
# 82
# 83
# 84
# 85
백마탑이다.
백마탑은 서역 역경승 구마라습과 관련이 있다.
구라마습(중국에 대승불교를 전파한 사람)이
타고 가던 애마가 돈황에서 죽었다.
그래서 이를 기리기 위하여 백마탑을 세웠다고 한다.
말 기념비가 관광지라니...ㅎㅎㅎ
# 86
# 87
간쑤성 돈황에서 2박 3일 동안
운전을 한 기사의 아들이다.
유원역까지 일행을 태워다 주고
혼자 돌아오는 길에 말동무하려고 불렀단다.
우리 도반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용돈까지 쥐어줬다.
# 88
# 89
유원역에서 하미까지는 약300Km에 달하고
열차시간은 거의 5시간 정도 이동한다.
우리 나라 비둘기호 열차가 떠오른다.
어느새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색다른 풍경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졸리면 의자에 길게 눕는다.
기차안에서 휴대폰 메모장에
돈황의 느낌을 쓰고 저장한다.
# 90
# 91
유원역 부근에는 석탄산업이 발달하였다.
노천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한 화물열차도 보인다.
차창으로 보이는 색깔은 까망이다.
# 92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황량한 고비탄을 완행열차는 달린다.
이따금 나타나는 작은 역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다.
황량한 사막 지평선만 보일 뿐
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며
힘겨운지 무더운 입김을 뿜어내며
기차가 쉬어가는 간이역....
# 93
# 94
비몽사몽 사이로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풍경이 지루해질 무렵
완행열차는 지친 여행객들에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차 방향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이쪽저쪽 옮겨다니며
셔터를 누른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
별이 뜨는지 지는지,
달이 뜨는지 지는지,
# 95
# 96
정시보다 약간 늦게 출발해서
정시 근처에 하미역에 도착한 후
가이드가 한 말
"이것은 로또맞은 것입니다.
얼마 전엔 자정 무렵에 도착해야 하는 기차가
다음 날 9시에 도착했습니다.
# 97
# 98
# 99
# 100
그랬다.
로또맞은 우리들은 자정 무렵
3일 동안 헤어졌던 신강성 기사를 다시 만났다.
네비를 따라 빙빙 돌며
아, 꿀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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