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술이라고 했던가.
이젠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을 헤집고 들어가보면
초등4,5학년 때쯤이 아니었나 싶다.
그땐 집에서 누룩을 빚어 놓고
모내기, 보리타작 등 집안의 대소사를 앞두고
집집마다 술이 익어갔을게다.
쌀을 고슬고슬하게 쪄서 술밥을 만들어
누룩과 함께 술독에 넣어 온돌방에 따뜻하게 놓아두면
삼,사일쯤 지나면 보글보글 달짝지근한 식혜처럼 익는다.
언니랑 숟가락 들고 살짝 떠 먹는 그 맛이란!
아직 알콜로 발효가 되지 않았기에
술이라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 때를 놓치면
이제 더 이상 단맛은 없어지고
시큼한 술이 되었지.
물을 적당히 섞어 채에 거르면 텁텁한 막걸리 완성.
곡식이 턱없이 부족하던 때 였으므로
쌀로 술을 만든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나보다.
하지만 민초들은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술 없으면 살 수 없는 고단한 삶을 살았기에
금주법을 보호하러 다니는 관리들과의 한판 승부는
피해갈 수 없었겠지
술 뒤지는 사람들이 이웃마을 벌포까지 왔다는
정보가 날아오면 온 동네가 술독과 누룩을 숨기느라
들썩거렸으니 벌금이 만만치 않았나 보다.
내가 어렸을 적에 했던 심부름 중에
제일 많이 했던게 소주 됫병짜리 혹은
주전자 들고 술 사오는 심부름이었다.
양친 두분 다 술 체질이었으니...
술 받아오면서 목마르면 한 모금, 두 모금
막걸리를 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목마를 때 목을 축이는 음료수 정도로
알고 있었고 취했던 기억은 없다.
정식으로 맥주와 소주를 처음 마신 것은
대학 다닐 때 분위기 좋은 음악다방에서의 맥주,
눈오는 날 포장마차에서의 닭발과 소주,
민속 주점에서의 동동주 등
두루 두루 섭렵했었지.
술김에 나쁜 길로 빴지도 않았고,
술 때문에 실수한 적도 없는걸 보면
술을 점잖게 배웠나보다.
결혼 후에는 원래 체질적으로 못 마신다고
공표하고 다녀서 애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다가
시부모 돌아가시고 조금씩 마시다가
몇년 전에는
주사모 (술을 사랑하는 모임) 4인방 모임을 만들어
1차 음식점 ,2차 라이브 카페 생맥주,
3차 민속주점, 4차 포장마차, 5차 공원잔디밭
최고 기록, 새벽 3시까지......
줄창 수다 떨며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
솔직담백한 대화들.....을 즐겼으나
지금은 술, 시옷자만 나와도 취한다.
내 몸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에
이젠 술자리가 부담스럽고 지겹기까지 하다.
4인방 모임은 내가 현재 학교로 온 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아! 그리운 그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또 술 친구들을 찾아 오늘도 마셔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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