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친구들, 경건한 고요속으로 들어가다.

올레리나J 2011. 8. 16. 14:29


<고대 이스탄불의 심장부였던 히포드럼>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의 바로 앞에 위치한
히포드럼 광장은 술탄 아흐멧 광장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비잔티움 시대에는 10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던 광장이다.
기원전 200년 경에
로마의 황제 세베루스에 의해
검투 경기장으로 만들어지고
그 후에도 계속 도시의 중심지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 곳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는 세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파라오에 의해서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이 탑은 총 높이 60M, 무게 800톤의 규모였는데
이곳에 옮겨왔을 때 세 조각이 나서
꼭대기 부분만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







< 히포드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념비인 뱀기둥>
원래는 기원전 479년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를 물리친 승전 기념탑이었다고
그것을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원래는 높이가 8M가 넘는 것이었지만
머리와 상단부분이 파손되어 현재 5M 정도만 남아 있다.
세마리의 뱀이 꼬아 올라간 형태의 이 기념비는
뱀의 머리 부분과 그 위에 직경이 2M나 되는
황금 트로피가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우상숭배 금지에 따라
잘려나간 것이라고...
세 개의 뱀 머리 가운데
한 개는 이스탄불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평균 6.5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 오벨리스크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고
1,600년의 세월을 이 곳에 서 있다.



그리고 아래 쪽 받침대도
4면에 부조가 새겨져 있다.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받침대 아래 쪽에 오벨리스크가 아직 눕혀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가 비잔틴 시대에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경기장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스포츠 경기장이면서 동시에 폭동의 무대이면서,
국민들의 여가 및 오락의 공간,
귀족들의 사회 모임, 결혼식,
시장 등이 열렸다는 곳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랬단다.
지금은.... 고대에 세워진 세 가지 기둥들이 남아
관광객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넓은 공원인 것이다.



* 오벨리스크(obelisk)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를 말하는데
네모진 거대한 돌기둥으로 되어있고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어있고
기둥에는 상형문자로 국왕의 공적이나
기타 도안이 그려져 있는 것을 말한다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일명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 불리우는 곳의 모습
‘‘모스크’와 ‘자미’ 모두 사원을 뜻하는 말인데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지칭하는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블루 모스크>


아름다운 이 사원은 오스만 제국의 제 14대 술탄인
아흐메트 1세가 지은 것으로
1609년에 착공해 1616년에 완공한 것이다.
사원의 건축은 위대한 건축가인
마흐메트 아아에 의해 완성되었다.
유독 종교적 신념이 철저했던 술탄은
기공식에 참석해 직접 땅을 파고 흙을 날랐다고 한다.
그는 13세에 술탄에 자리에 올라
26세에 이 사원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만,
아쉽게도 그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완공 이후 1년 만에 돌연 사망했다고.
건물은 높이 43m, 직경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을
4개의 중간 돔과 30개의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으며,
6개의 미나레(첨탑)가 본당을 호위하고 있다.



'미나레'는 이슬람 사원 주위에 세워져 있는 첨탑으로
사원마다 첨탑의 숫자가 다르다
1개가 있는 곳은 개인이 지어서 기부한 것이고,
2개는 장군이, 3개는 국가가,
4개 이상은 술탄 (이슬람의 최고 종교지도자)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때에는 이 미나레의 갯수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고의 자미를 짓고 싶었던 술탄은
당시 2-4개의 미나레가 일반적이던
자미 건축 전통을 뒤엎고
무려 6개나 만들었다.
건설 당시 이슬람의 총 본산인 메카의 미나레도
6개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자신은 황금(터키어로 알툰 Altun)으로 지어 달라고 한 것을
건축가인 마흐메트 아아가 숫자 6(터키어로 Altu)으로
잘못 알아듣고 지었다는 후일담이 생겨났다는데
떠도는 일화들이 가이드마다 다른지 어쩐지 가지각색이다.

뙤약볕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하고 있다.











블루모스크 안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자미(사원)는 종교적 시설물이기 때문에
관람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에티켓이 있다.
엄숙하고 경건한 이미지로 반바지나
소매 없는 티셔츠 같은 과다노출은 피하는 것이 기본이다.
노출이 심한 사람들에게 머리부터 상체를 가릴 수 있는 보자기를 준다.
관광객은 신발만 벗고 들어가면 된다.







21.043개의 타일로 이루어졌다는 블루 모스크 .
사원 내부의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과 그림의 색들이
거의 푸른 색과 녹색을 띄고 있다.














오스만투르크의 자랑 블루모스크....
99가지 종류의 파란색 타일 2만1천장 정도가
신비한 푸른색 빛을 내고 있는 블루모스크 앞에 서면
무릎꿇고 기도하고 싶은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줄 알았는데..ㅠㅠ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관광객들로 인해
오만 가지 냄새들이 코를 찌른다.
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움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꼬마 술탄 때문에
그나마 한자리에 오래오래 서 있을 수 있었다.











사원은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왼쪽의 넓게 카펫만 깔린 부분은 기도하는 곳
그리고 발 디딜틈이 없이 사람이 가득한 공간은 관광객들을 위한 곳

카펫은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큰 발전을 보였다는데
이슬람 기도회가 바로 카펫이 깔린 바닥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카펫이나 타일은 각 지역마다 독특한 디자인과 색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고한다.







비슷한 문양들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이 다르다.



기도하고 았는 이슬람인 사이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앙증맞은 꼬마 술탄이 뛰어다닌다.
큰 아이는 자연스레 포즈를 취해주는데
작은 녀석은 애를 태운다.
이 사진을 찍으려고 홀로 10분 늦게 나갔다가
가이드한테 친구들이 야단맞았다. ㅠㅠㅠ





 








성 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
정원에서 바라본 성당
성 소피아 성당의 미나레(첨탑)... 성당에 미나레?
537년에 건설되어 이스탄불이 오스만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 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어서
교회 건물과 이슬람 사원이 혼용된것..
그래서 이런 특이한 건물이 탄생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터키엔 이런 유적들이 많다.











블루모스크 바로 옆에 정원을 사이에 두고
성당 건물이 있다.
세계사 시간에 비잔틴 건축의 대표로
열심히 외웠던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로마식 기념비
교회가 건축된 이래로 제국의 멸망까지
약 800년 동안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물도 건축되지 못했다는 이 곳.



성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복도(외랑과 내랑), 본당,
그리고 2층 갤러리 부분
여긴 먼저 외랑의 모습
기도를 준비하는 장소인
이 외부 복도의 벽과 천정에는 별다른 장식없이 수수하다.



외랑과 달리 내랑은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다.
천청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혀 있으며,
벽들은 모두 테세래라고 불리는 대리석 판넬과
아름다운 돌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앞 쪽에는 여러 개의 문을 볼 수 있는데,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모두 9개가 있다.
이들 중 좌우로 맨 끝의 3개씩,
모두 6개의 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문,
한 가운데의 가장 큰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었고,
양 옆의 황제의 문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 관직자들, 사제들, 그리고 황제를 보필하는
대신들이 사용한 문이라고 한다.



황제의 문 위의 박공 머리에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쪽 원은 성모 마리아님,
오른 쪽 원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이,
앞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높이 55.6m의 돔은 이스탄불과 터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다섯 개의 돔들 중 하나라고..
놀라운 것은 장대한 규모의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둥이 아니라 15층 높이의 거대한 돔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돔의 다른 특징 중의 하나인 40개의 창문
이 많은 창문은 자연광을 이용해 벽화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금색으로 그린 모자이크화가 조명을 받아
엄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겠지...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이 성당을 지을 때,
설계는 당시 최고의 수학자이자 건축가인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로스에게 맡겼으며,
깊이 77m, 너비 71.7m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 십자형의 플랜에 가깝게 지었다.
높이 55m, 폭 33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을
코끼리 다리로 불리는 4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헌당식에 임한 황제는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
라고 외치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슬람 문자가 새겨진 커다란 원판이 있는데
하나는 알라(신), 하나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원판은 이 돔에 모두 8개로
이슬람 초기의 4대 칼리프들의 이름인
에부 베키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의 이름이,
그리고 선지자 무하마드의 손자들이자 칼리프였던
하산과 휴세인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직경 7.5m의 이 원판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달필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



537년 완공된 성당은
726년 우상타파의 시대에 모자이크 화들이 수난을 당하고,
1204년 제 4차 십자군들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이 곳의 보물들이 모두 약탈 당하고,
금 바탕으로 된 모자이크들도 대단히 많이 파괴되었다.
십자군 점령 기간에 성 소피아는 카톨릭 교회로 사용되었고,
1261년 다시 비잔틴이 재 탈환했을 때,
다시 그리스 정교회로 사용되다가 14-15세기에 있던 지진으로
성 소피아는 심하게 파손된 채 버려졌다.
오스만이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성 소피아는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되었고,
다시 1847년, 1849년에 큰 복구 공사를 했다.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은
지금도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고..



왼쪽 복도의 앞부분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기둥은 일명
<눈물 기둥> 또는 <땀흘리는 기둥>이라고 불리운다
내부가 약간 젖어 있는 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집어 넣고
완전히 한 바퀴를 떼지 않고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줄을 서서 기다려 돌렸는데...
떼지않고 한바퀴를 돌리는데 집중하다보니
그만 소원을 비는 것을 깜박 잊었다는 것...ㅠㅠㅠ



오늘의 빠듯한 일정과 더위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이렇게 앉을 곳만 있음 일단은 앉는다...



2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이 아니라 비탈길이다.
2층 여성들이 예배를 보던 곳으로,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2층 갤러리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전등이 꽃처럼 보였다.



또 앉았다.



천국의 문을 지나 들어가면 오른 쪽에는
성 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자이크가 있다.
대단히 정교하고 화려한 이 모자이크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있다.
이 또한 십자군이 점령할 당시에
상당히 많이 파손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디시스>라고 불리는 이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님과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죄인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라고..
1453년 이곳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원래 이 성당을 헐려고 하였으나.
건물의 아름다움에 반한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살아남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때 미나레를 세우고,
십자군들에 의해 살아남은 모자이크화들은
이렇게 회벽으로 덮이게 되었다.



오른 편의 또 다른 모자이크
가운데 성모 마리아님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양 옆에는 황제 콤네노스와
그의 부인인 이레인의 모습이 있다.



















기독교의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함께 공존했던 증거
정면에는 미흐랍(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방향으로 설치된 단)이 설치 되어 있고,
위를 올려다보면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 마리아님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지도를 보면
대부분의 관광지가 유럽쪽에 있다.
근거리에 있지만
하루 하고 반나절에
이곳 모두를 돌아보는 일정이라 힘들었다.



<식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물 저장소 아라베탄 사라이>
이스탄불은 2천년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당시부터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도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서 발생한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바로 식수문제였다
이들은 물 부족 해결을 위해 콘스탄티노플 북쪽에서
19km 정도 떨어진 곳의 강물과 지하수를 끌어와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했다.
이 물 저장소가 그 시절 존재한 이유는
첫째는 수로를 통해 끌어들인 물을 이곳에 가득차게 저장시켰다가
한꺼번에 물을 내보냄으로써 수압차 조절을 통해
높은 지대까지 용이하게 식수가 공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이거나 도시가 포위되어 수로공급이 차단됐을 때
물이 부족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물저장 탱크의 용이다.
물론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관광명소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 가보면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어두운 지하공간이 나온다.
도리스 양식과 코린트 양식이 혼합되어 사용된
조명을 받은 336개의 커다란 돌기둥들이
우뚝 솟아 있어
아라베탄 사라이 모습은 화려하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물 속으로 던진 동전 사이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도 있다.



기둥



그리스 신화에 아테네 여신의 노여움으로 저주를 받아
메두사가 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하궁전에 메두사의 머리가 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메두사의 상징을 너무 무서한 나머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하 저수조에 거꾸로 파묻었다고도 하고,
식수로 사용되는 물 저장소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됐다고도 한다.
어쩐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돌이 될 것만 같아서
뱀 머리카락만 슬쩍 쳐다보았다.






버스가오기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데
여학생들이 말을 붙일듯 말듯 하여 환하게 웃어주었더니
한국말을 쏟아낸다.
자기들은 대학생인데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류열풍이 유럽을 들썩이고 있다는걸 아는지라
가수 누구를 좋아하냐 그랬더니
슈쥬는 물론이고 엠블랙 fx 등..줄줄이 나온다.



서울에 동대문 시장이 있다면
이스탄불에는 그랜드 바자르가 있다.
미로처럼 비슷한 물건들이 형형색색 눈길을 붙든다.
너무 화려하여 사진을 찍지 않았다.
여행 막바지에 나타나는 현상...
모든게 시니컬해진다.
그런것도 있었지만 흥정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접시라도 하나 살까 했더니 가게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바가지를 터무니 없게 씌우기도 해서
흥정하는데 서툰 나는 정작 물건을 사지 못했다는 것...
한국사람들이 어찌나 많이들 깍아대는지
상인들이 한국사람한테는 가격을 세게 부른단다.
물건 고르고 흥정하는데 자유 시간 1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렸다.







한식집 가야에서 오랜만에 그리운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한식 메뉴...
이 정도의 차림이 이곳에서는 10만원 정도라고...



호텔로 돌아와 잠자기전...
가지고간 터키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내 이름은 빨강'을 보고 있는데
셔텨를 들이대서 얼굴을 가림...
잠이 오지 않을때 짬짬이 절반은 읽었다.
최고의 수면제이다.

친구들과 차 한잔 나누며
우리들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