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이 만나는 터키

친구들, 보석 보따리를 풀다.

올레리나J 2011. 8. 17. 20:26


이스탄불은 기원전 334년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가 지배하고 있던 이 곳을
알렉산더대왕이 차지하면서 페르가몬왕국이 되었고,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이 이 땅을 로마로 넘겨주면서
로마문화의 뿌리가 내리게 된다.
(오늘날 터키땅의 고대유적들의 대부분은 로마유적이다.
그래서 성지순례 떠나는 사람들도 현재 이슬람 국가인데도
이 곳 터키로 성지순례를 오는 이유다.)
로마는 너무나 광대한 영토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이스탄불로 옮기며
이 곳의 지명도 당시의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고,
비약적인 발전도 하게 된다.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이 곳은 동로마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민족의 침략과 셀죽시대를 지나며,
1453년 마침내 동로마는 오스만투르크에 망하고 나서
오스만투르크는 아나톨리아와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이 번성하는 땅'이라는 이스탄불로
그 이름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지며 각가지의 문명이 꽃 피워지던 땅,
오늘도 동, 서로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 문물의 교류지,
그리고 접경지대인 곳,
여전히 '세계의 수도'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탄불...
이스탄불 구시가지는 복잡하지만 도시계획이 불가능한 곳이다.
어디라도 땅을 파기만 하면
지금도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하철은 없고 트렘이 지나다닌다.

이스탄불의 위치는 정말 묘한 자리에 있다.
도시의 가운데를 에게 해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고
이번에는 골든 혼이라는 금각만이 도시 가운데를 가로질러 들어와
유럽지역의 이스탄불을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눈다.
하나의 도시에 구도시와 신도시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함께 있는 도시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문화뿐 아니라
문물이 늘 교통하는 곳이 되어 항상 흥청거리는 도시가 되었다.
정말 목 좋은 곳에 있었으니
누구 말대로 판만 잘 벌이면 떼돈을 벌던 곳. ㅎ



호텔 쉐라톤에서의 아침



















터키의 지도는 왼손바닥이라고
가이드가 한 말이 생각나서
우리집 식탁에 있는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니
왼손바닥을 쭉 폈을 때
엄지 쪽에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검지쪽에 그루지아,, 중지쪽에 아르메니아
약지 쪽에 이란,이라크 그 밑으로 시리아...
7개 나라와 국경이다.
이 나라 지키려면 군대가 많이 필요할 터
그래서인가? 우리 나라처럼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버스 타고 가면서 찍은 사진

터키에는 우리 나라 교회 십자가처럼
이런 모스크와 미나레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hce Saray) >
1850년대 지어진 왕궁은
놀랍게도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웠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 31대 왕이
유럽식으로 본따서 지은 궁전으로
1920년대 까지 최후의 6명의 술탄이 거주했던 곳이며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관저로 사용했던 곳이다.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이곳에서 사망 했을 때.
시계는 그 시간에서 멈춰서
방안의 시계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서거시각인 9시 5분을 아직도 가리키고 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늠름하고...우리 나라 헌병처럼...







돌마바흐체란 "가득찬(dolma)" "정원(bahce)" '이란 뜻이다.
이 궁전은 오스만 트루크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1843년부터 1856년 까지 13년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보다 더 화려하게 건축을 하게 되었다.
작은 방이 286개, 큰 홀이 46개이며
내부의 장식을 위해 순금 14톤,
은 80톤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현 시가로 환산하면 5조원 이상의 돈이
이 궁전을 짓는데 사용 되었다고 한다.
차관을 들여다가 궁전을 지으면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 궁전의 건설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 앉고
그 여파로 침몰을 시작했다.
그러나, 후세에 남은 자들은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관광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덕을 보며 산다는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크리스탈에 황금을 넣으면 적색이..,
크리스탈에 은을 넣으면
청색 크리스탈 전등이 탄생한다.
천정에 덩그러니 걸린 샹들리에...
그리고 깊은 청록색의 천정... 아름답다.



터키의 부자는 지금도 황금잔이나 칠보잔을 쓴다.
보통집은 은제품, 은수저를 쓴다.
150년전 은식기, 은주전자도 그대로 있다.
그 당시의 커튼도 그대로 걸어 두었는데
무늬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상아로 만든 등 장식 뒤로 화려한 황금빛 천정이 눈부시다.



러시아 니콜라스 2세로부터 받은 곰 가죽



현재는 호텔,학회, 연회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했을 때,
묵은 곳이기도하고 반기문 총장도 이곳에 묵었다고 한다.
스위트 룸의 경우 하룻밤에
800만-1000만원 정도라고 하니 우리 같은 서민들은 꿈도 못 꾸겠다...
꿈은 꿀 수 있지..아니,
아무리 꿈을 꾸고 싶어도 살아보지 않아서인지
꿈속의 배경은 흐리흐리...
부시, 블레어, 카터, 클린턴 등도 물론 다녀간 명단....











여자들이 살던 곳 하렘도 있다.
오직 술탄만 넘어오는 금남의 구역이다.
노예로 잡혀온 미녀들만 거주했으며
때로는 그들의 암투에 의해 술탄이 피살되기도 했다.
복도의 유리꽃문에서
답답함을 달래던 하렘들은 여기 앉아
바다를 바라보곤 했겠지...
자유롭게 오가는 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시대에 가장 권위있는 사람은 첫째가 술탄,
둘째가 술탄의 어머니다.
어머니가 여인을 골라 주었단다.



벽난로



술탄의 공부방에는 독어의 책 2만권이 있다.
터키인 중 50대 이상은 영어를 못 한다.
독어를 주로 쓴다.



역대 술탄의 사진







술탄의 방은 14톤의 금 중 4.5톤의 금이 들어간 곳이다.
천정의 금이 쏟아내릴 듯하다.
13세~18세 소녀가 8년간 짠 카펫트가 깔렸다
매듭이 많을수록,
무늬가 많을수록 좋은 카펫트다.
술탄이 수집해 놓은 이집트 시계,
나폴레용 비가 선물한 피아노,
나폴레옹이 선사한 화려한 집기들...
모두가 역사를 말하고 있다.



술탄이 여인과 함께하던 목욕탕
대리석을 달궈 증기를 내는 터키탕



무게 4.5톤, 높이가 36m..가장 아름다운 크리스탈등...
750개의 촛대로 구성된 초대형 상들리에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로 주었다고..
이 곳의 화려함에 입이 쩌억,
아! 정말 화려함의 극치다.
내가 유렵의 여러 궁전에 가보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한건지
계산이 어려울 정도로 화려했다.
유럽의 궁전에서 기독교적 장식만 뺐다.

궁전에서는 모두가 다 주인공이다.
설마 자기 자신을 무수리나 마당쇠로
상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 궁에서 산다면...살았다면...
주인공이 되어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했다..
그래서 미소가 저절로 피어났다..



우리들도 공주처럼....























잠시 후 저런 배에 우리가 타고 있을거야.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게 되겠지...



보스포러스의 물결이 바로 앞에 넘실거리는 곳
왼쪽에는 바다오른 쪽은 궁전
궁전에서 보니 경치가 넘 좋았다.
포스포러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대리석들은 마르마라 해에 있는 섬들에서 가져온 것이고,
이집트의 아라바스터 대리석,
그리고 고대 페르가몬에서 가져온 반암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침 근위병 교대식이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화려하게 핀 수국 속에 친구가 있고
그 너머에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궁전을 나오면서...아쉽다.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늦게 가면 오랫동안 줄을 선다던
가이드 말이 엄포는 아니었나 보다.


돌마바흐체 시계탑은
1890년 술탄 압뒬 하미드 2세의 명령으로
건축가 사프키스 발얀에 의해
궁전의 정문 바로 앞에 세워진 것이다.
높이가 27m인 4층으로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윗 부분은 돌덩이로 만들어져 있다.
탑의 사면 꼭대기에는 프랑스 폴 가르너의 시계와
오스만 제국의 왕실 상징인 문장이 있다.







궁전의 입구인 제국의 문







마지막으로 ...가는 날까지....쇼핑샵에 데려온다.
올리브유,천연 화장품 등등 ...
한국관 광객들이 사놓은 쇼핑백들이
한 켠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현지 식당 주방이다.



















빵굽는 아저씨...



블루 모스크 뒷쪽







이 더위에 카펫 짜고 있는 터키인...
한 개 사주고 싶었다는...



톱카프 궁전



입구에 들어왔는데 또 한참을 걸어간다.



덥지 아니한가?



시원하지 아니한가?



톱카프 궁전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 유통 모든 면을 독점하였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궁전이다.
거의 5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궁전은
전체 면적이 약 21만평이며,
크기 면에서는 바티칸의 두 배이며,
모나코의 절반 크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3개의 문과 4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톱카프 궁전은 일반적인 궁전 건축 양식에 비해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궁전을 건축하기 전에 수세기 동안 유목 생활을 했던 오스만들은
궁전 건축에도 유목민적인 전통을 반영시켰다.
유목민들이 큰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텐트를 치는 것처럼
(몽골족의 게르?)
아름다운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지었다.
보통 궁전들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데
이 궁전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래서 가이드도 전체적인 것만 설명을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서..
보고 싶은 보고, 쉬고 싶음 나무 그늘에서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심심찮다.







제 2정원 왼편에 자리한 쿱베알트라고 불리는 의회건물
의회 위에는 높이 42m의 정의의 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으며,
감시탑으로써 궁전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지침대 중의 하나라고 한다.



문을 통과하면 제 3정원으로 들어선다.
<바부사데드> 또는 아크아알라르 문
(일명 지복문 또는 백인 내시의 문)이라고 불리며
궁전에서 세 번째로 큰 문이다.
500여년 동안 궁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이 문 앞에서 열렸으며
이 문을 중심으로 궁전의 행정 지역과
술탄의 거주 지역이 나뉘어 진다.



우리도 단체 사진 찍고 흩어졌다.



여기는 3정원











보물 전시실은 4개의 방이 연결 되어 있고
대단히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발코니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에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발코니







뒷쪽은 톱카프 궁전의 백미인 보물 전시실.
맨 위쪽에 올려둔 86캐럿의 다이아몬드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이 86캐럿의 다이아몬드 사진은
책에 실린 사진을 캡쳐한 것을 따옴















기타 궁전 유물을 전시해 놓은 전시실의 외관으로
이곳에서 모세의 지팡이,
세례자 요한의 유골 일부 등을 볼 수 있다.



보물 전시실 앞에는 돌아보다 지친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그늘이 부족하여 쉴 곳이 없었다.
궁전에 소장된 유물은 총 8만 6000여 점으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약탈이 없었으므로
원형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값을 메길 수 없을 정도의 갖가지 보물들도
이 더위에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햇빛이 사정없이 발을 뻗치려고하는 소박한 나무 그늘에 앉아
가이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여행하긴 처음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나간다.







멀리 우뚝 솟은 탑은 갈라타 탑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비잔틴 제국에서 이 탑을 쌓을 때
탑의 용도는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로 드나드는
배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전망탑이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그 탑의 높이를 7m 정도 낮추어
포로수용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갈라타 다리는 위로는 차가 다니고 아래는 음식점이 있다고..



크루즈가 출발하는 항구의 모습
크루즈라고는 하지만,
하나투어 전세선이라 배가 그리 크지는 않다.
31명의 우리 일행이 타기에 딱 알맞은 배 정도...






매년 이곳을 통과하는 배는
3만 8000여 척에 달한다 한다.
지중해를 거쳐 대양주로 가려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의 배들도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꼭 거쳐야 한다고...







갈라타 다리 옆에 위치한 예니 자미의 모습
이스탄불의 자미 중에 가장 오랜 공사를 하고 있다고..
처음에 메흐메트 3세의 어머니이자
술탄 셀림 2세의 부인이었던 사피예의 명으로 짓기 시작했는데
건립 도중 술탄이 세상을 떠나자 재정적 문제까지 겹쳐
56년 동안 공사가 중단 되는 비운을 겪은 곳이다.
1663년에 메흐메트 4세 때 완공되었는데,
완공기념 개막 기도회가 열렸을 때,
축하의 의미로
금은 동전을 시민들에게 뿌렸다고 한다.
돈비를 맞았겠네...



이곳은 지중해를 도는 크루즈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라
크루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물 10층 높이의 크루즈들..
옆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평균 바다 깊이 50-120m
좁은 곳은 폭이 660m,
넓은 곳은 흑해와 만나는 곳으로 3.5km
평균 흐름의 속도가 시간 당 3-4km이며
양 방향으로 강한 급류가 흐른다.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흐르는 바다 물은 바다 표면으로 흐르고,
흑해 쪽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흐르는 물은
40m 깊은 바닷 속으로 흐른다고 하니 신기하다.
기후가 좋지 않을 때는
물의 흐름이 시간당 8-9km까지 흐른다지만
우리가 갈때는 흔들림 없이
평화롭게 잔잔히 움직였다.



보스포루스는 그리스어로 <암소가 건너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강의 신 이나쿠스에게 이오라는 이쁜 딸이 있었는데
바람둥이 제우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제우스가 이오와 함께 있을 때
부인인 헤라 여신이 나타나자
다급해진 제우스는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킨다.
암소가 이오임을 눈치 챈 헤라는
제우스에게 자신에게 줄 것을 청하고
겨우 소 한 마리 때문에 쫀쫀하다는 인상을 줄까봐
제우스는 암소를 헤라에게 넘겨준다.
이후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 헤라는
눈이 100개가 달린 아르고스라는 괴물을 시켜
감시하게 하고 밤낮없이 괴롭힌다.
보다 못한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아르고스를 없애라는 명을 내리고
헤르메스는 양치기로 변신해 피리를 불어
아르고스를 잠재운 후 처치한다.
헤라는 아르고스가 죽은 것을 알고
등에를 풀어 더더욱 이오를 괴롭히는데
참다 못한 이오는 결국 탈출을 시도해
해협을 헤엄쳐서 건너갔다.
이 때부터 이곳은 암소가 건너간 곳이라는 뜻의
보스포루스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단다.



빌딩 그리고 자미, 그리고 미나레...
이슬람인들은 저 곳에서 엎드려 기도한다.











아까 다녀온 휘황찬란한 금은 보석으로 꾸며진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2층 창가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지...
그리고 정원의 수국도 생각나는데
하나도 보이질 않네
얼마나 으리으리한 궁전이겠는가?







보스포러스 다리가 보인다.







이번에 보이는 곳이 포 시즌 호텔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묵었다 하여 유명하다고...







츠라안 팰리스 호텔
예전에 왕족이 사용하던 궁전을 개조하여 호텔로 사용하고 있단다.



갈라타사라이 대학
이런 곳에 대학 켐퍼스라...
학생들의 눈이 맨날 창밖의 해협을 오르내리는
배 구경하느라 공부는 언제 하누?



보스포루스 다리 밑에 있는
바로크풍으로 지은 오르타쾨이라는 자미











이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러스 브릿지를 지나간다.
아타튀르크 브릿지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1973년에 완성된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터키인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은 터키의 국부이다.
지금도 터키인들은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 같은 인물이
한 번 더 나와주기를 기원한다고...
가이드가 자주 하던 말이다.



보스포러스 브릿지는 현수교로써
다리의 전체 길이는 1.560m
하루에 200,000대의 차량과
600.000명의 사람들이 이 다리를 통행한다.
유럽에서 4번째로 긴 현수교이며
세계에서는 7번 째로 긴 다리라고 하는데
인천대교도 생겼고
또 다른 나라에서도 쉼없이 건설되고 있을진대
아직도 그런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까?
나중에 조사해 봐야겠다.



















모처럼 시원한 바람 쐬며 쉬고 있는 친구들...
1시간 30여분 동안
난 한 번도 앉지 않고 셔터만 눌렀다는....
잠시 후면 터키를 떠난다는 아쉬움에...











보스포러스 다리 아래 쪽 아시아 사이드에는
베일레르베이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술탄 32세인 압둘 아지즈에 의해 세워진 술탄의 여름 궁전으로
1865년 세워진 곳이다.
돌마바흐체 궁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궁을 본 떠 만들었기 때문에
바로크 양식과 오스만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건물 공사 때
5,000명의 일꾼들을 서로 화해시키려고
오케스트라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길이 65m, 폭 40m에 내부에는
여섯 개의 큰 홀과 24개의 방이 있으며
보통 다른 궁들은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곳은 이집트 산 돗자리로 마감을 하였다고 한다.







































크즈 쿨레시(처녀의 탑)의 모습이다.
크즈는 처녀, 쿨레시는 탑이라는 뜻~
알려진 전설을 소개할게요.
옛날 위스퀴다르 일대를 다스리던 왕에게 딸이 있었는데
16세가 되기 전에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딸을 구하고자 왕은 바다 위의 탑에
그녀를 보내고 음식물을 날라다 준다.
세월이 흘러 딸이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생일 축하 과일 바구니를 딸에게 보냈고
바구니에 숨어 있던 뱀이 나와 결국
예언대로 독사에 물려 죽었단다.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는 동화같은 이야기...ㅎㅎ

원래는 12세기 비잔틴 제국의 해양 감시초소였는데,
오스만 제국 때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의
통행세를 받는 곳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져녁 식사를 하려면 예약은 필수라고!
왕복 배는 보내주나?







멀리멀리 톱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의 미나레가 보인다.
내 눈에만...



배 탄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9일 동안 엄청 고생한 내 발







로마 시대에 지어진 도수교...
이 도수교를 통해 이스탄불 외곽에서
물을 들여와  이스탄불 시내에 있는
지하 물저장고에 저장되었다.
버스 타고 지나가면서 재빨리 담았다.







한식당 고려정



우리 나라 축구 올림픽 팀이 전지훈련을 다녀갔나 보다.
그들의 사진과 싸인이 걸려 있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다시 왔다.
핑크색 내 가방이 손잡이가 들어가서 나오지않고
닫아지지도 않는다.
떠날 때부터 불안불안하여 밴드 사가지고 간게 천만다행...
5년간 훌륭한 내 여행 파트너였다.
그땐 핑크색처럼 눈에 확 띠는 가방이 없어서
짐 찾을 때 멀리서도 나의 것임을 알 수 있어서 너무 편리했는데...
오자마자 망치로 두들겨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에 들어갔다. ㅠㅠㅠ



이렇게 수속을 밟고...대한 민국으로 고고~~~











이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운 좋게도 오고갈 때의 좌석이 창가라서
한잠을 자고 일어나니 석양이 이쁘게 물들어 있었다.
해가 꼴딱~ 어디론가 넘어갈 때까지 나 홀로 깨어있었다.
이건 아무도 못보았을 게다.
전부 피곤하여 잠에 취해서...







드디어 인천공항이다.



영원한 친구와 끝없는 사랑....

 

나의 Ami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