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의 입구
표 개찰을 한 후 기념으로 찰칵했으나
어~라~ 너무 가까워서 찍히지 않네...
최샘이 이렇게 완성!
진 시황제 그는 누구인가?
중국 진(秦)나라의 황제로 성은 영(贏), 이름은 정(政)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나,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그는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원래 후계자 반열에서 거리가 멀었던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다.
정은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다.
진은 전국시대(戰國時代)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나라를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전체주의적인 국가 철학을 바탕으로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와 군사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
BC 238년에 공식적으로 친정(親政)을 선언하기 전까지
사실상 여불위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친정 이후 그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은
자기 어머니와 정을 통한 여불위와 반대파를 제거한 것이었다.
뒤에 승상(丞相)이 된 이사(李斯)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능한 조언자들을 왕 주변에서 떼어냈을 수도 있는 이방인 추방 법령을 폐지했다.
진나라는 첩자, 많은 뇌물, 재능 있는 장군들의
가혹하면서도 효과적인 지도력 덕택으로
나머지 여섯 경쟁국을 차례로 점령하여
마침내 BC 221년에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룩했다.
(능 주변의 석류밭)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皇’와 ‘帝’를 따고,
‘처음[始]’이란 뜻을 넣어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게 했다.
또한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가 만세(萬歲)를 지속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황제로서 그는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지방 관리의 독립된 통치 지역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전국을 36개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한 관리로 하여금 각 군·현을 통치하게 했다.
또한 도량형을 비롯하여 마차 바퀴의 폭과 법률·문자를 통일했다.
도로와 운하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북방 변경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를 건설했는데,
훗날 이것들이 연결되어 만리장성을 형성했다.
BC 220년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조직을 감독하면서
신성한 여러 지역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자신이 마침내 제국을 통일했음을 알리고
각지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웠다.
시황제가 전국을 순행한 또 다른 동기는
마술과 연금술에 관한 자신의 관심 때문이었고,
나아가 자신을 불로장생하게 해주리라고 여겼던
연금술사와 마술사를 찾기 위함이었다.
BC 219년 동쪽 바다에 있는
어느 섬(일본으로 추측됨)에서 이러한 것을 구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계속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유가(儒家)들은 그 조치들이 사기성이 짙은 행위라고 비판했는데,
이로 인해 비판자들 중 460여 명이 처형되었다.
옛 봉건적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끊임없는 논쟁은
213년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진시황제와 관련된 일들을 벽에 새겨놓은 부조)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를수록 측근들의 불만이 커지고,
백성들로부터의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세 번이나 있었다.
거대한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BC 210(또는 209)년 그는 순행(巡行) 도중에 죽었고,
거대한 능에 묻혔다.
강력한 지배자가 사라진 후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의 항쟁이 발생하여 결국 BC 206년 진은 붕괴되었다.
전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나 우리 일행은 걸었다
능 주변이 모두 석류밭이었으나
(도굴 방지를 위해 일부러 석류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관광객을 위해 조경수를 심어 커다란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 춥지 않아 걸을만 했고 공기도 상쾌했다
경주나 공주의 능을 상상하고 왔으나
뒤로 보이는 작은 산이 진시황릉이라 한다.
진시황릉을 짓기 위하여 38년 동안
72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중간에 굶주리거나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웅덩이에 묻어버렸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지하궁전의 비밀을 지키려고
4만 명의 인력을 가두고 강제로 매장시켰다는 안내원 말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결국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장생불사를 염원하며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은
제 수명도 채우지 못하고 49세에 죽었으며
그의 자손 23명도 요절했거나 모두 제 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황릉이라 하지만 언뜻보면 하나의 야산이고.
황릉이라 하니까 황릉인 줄 알았다.
황릉의 높이는 76m이며, 사방으로 500m로
세계 최대의 능묘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사기의 기록에 나와 있는
화려하고 엄청난 진시황릉의 묘사에 대해,
처음에 학계는 과장되거나 꾸며진 전래담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도 않은
경이로운 병마용갱이 발굴되면서
기록에까지 나타난 진시황릉은 얼마나 대단할 것이냐는 의문과 함께
그 놀라운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당국은 진시황릉의 발굴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로선 능을 열고나면 급격한 산화부식을 막을 기술이 없다고 보고,
신기술이 나타나지 않는 한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생전에는 진시황릉을 직접 볼 기회는 없을 듯하다.
만일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유적을 직접 보게 되겠지만...난...
여기서 공연을 하는지 넓은 무대가 있어 올라가 보니
웬지 공연을 해얄 것 같아서...
그대와 춤을.....
화장실 표지판 옆에 회나무
황릉 입구의 상인
병마용갱 가는 길
입구 주변의 여우털
모자
허름한 자전거도 보였다.
5년전에 다녀온 동료의 얘기를 들어보니
당시에는 거지들이 손을 벌리며 모여들었다고...
경제가 날로 발전해서 그런지 주변이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입구의 진시황제 동상 뒷모습
이런 차림의 여자들이 많이 보여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개인 안내인들이 일정한 돈을 받고 가이드를 해준다고...
공중화장실로 돈을 받는단다.
말 동상이 금방이라도 휘이잉! 소리지르며 내달릴 것만 같았다.
꼬리를 묶어놓은 이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이라고...
고구마 굽는 냄새가 고소했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에 있는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를 말한다.
1974년 중국 서안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가 발견했다.
이 농부는 땅속에서 발견된 도기 인형의 조각과 쇳조각을 보고
이 사실을 신화사 통신 기자에게 알렸고,
인민일보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 발굴팀은
1974년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하였고,
7월 21일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총면적 25,380㎡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다.
아직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에 이른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項羽)에 의해
많은 수가 파괴되어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도용(陶俑)의 크기는 1.75~1.96m,
도마용(陶馬俑)은 높이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겉옷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되어 있다.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면서 색이 바래고 말았다.
1호갱의 도용들은
진나라 군대의 진용으로 도열해 있다.
창병과 궁병의 보병대로 이루어져 있고,
대열의 뒤에는 말과 그 관리병이 배치되어 있다.
도용들은 틀로 찍어낸 듯 똑같지 않고,
저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실제로 각 병사들을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병사들은 196cm의 키에서, 178cm에 이르는 다양한 키를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서역의 유목민족의 얼굴을 한 병사도 있다.
구워진 몸통에 머리를 따로 구워 결합한 구조이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채색을 한 도용이 발견되어,
당시에는 안료로 채색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호갱은 여전히 발굴 중이다.
갱이 붕괴된 상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각 조각들을 일일이 떼어내어 조립하여야 한다.
1976년 4월 1호갱 동북쪽 20m쯤 떨어진 곳에서
또 하나의 갱이 발견되었다.
2호갱으로 약 6,000㎡의 넓이에
길이 96m, 폭 84m 규모다.
갱도는 정방형인 1호갱에 비해
L자 형으로 생겼다.
2호갱 역시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다.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弓弩兵), 기마병(騎馬兵), 전차병(戰車兵)이 포진하고 있다.
옷이 가벼운 3줄의 선두부대. 기동타격대다
병마용들이 아래에 있으므로 가까이서 찍지 못해 작아보이지만
실제는 1.75~1.96m로 건장한 장성들
그리고 병마용 만든 사람의 실명들이 새겨져 있으므로
제품의 품질관리와 실명에 따른 책임은
기원 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나 봐요.
건장하고 남성미기 넘치는 거의 실물크기의 병사들이 살아 있는 양
언제라도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박차고 나갈 기세로 도열해 있다.
모두가 표정이 다르지만 그 비장함 만큼은 모두에게 있다.
묻혔던 그 어둠의 자리에 똑바로 서서 이천년을 지내며
지금 햇살 아래 다시 살아 있었다.
통일제국 진(秦: Chin)의 이름은 서양에
‘시나’, ‘지나’, ‘지네’ 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역수입되어 오늘날의 China로 되었단다.
자신은 비록 염원했던 장생불사는 이루지 못했으나,
China라는 국호와 능을 지킨다는 이 흙으로 빚어 만들어 순장시킨
병마(兵馬) 도용(陶俑)은 그의 바람대로
만세까지 불로장생하는 것 같다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한지 신발 바닥 무늬까지 새겨놓았다
1976년 5월 11일에는
1호갱 서북쪽 25m 떨어진 곳에서
520㎡ 넓이의 3호갱이 발견되었다.
3호갱은 군사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4호갱은 갱만 만들고 미처 병사들을 만들지 못하고
진시황이 죽어서 그만둔 것으로 추정된다.
내 목 돌려줘!
박물관
앉아쏴!
장군 도용이다.
지위가 높은 계급에 어울리게
기품있는 얼굴과 복장을 하고 있다.
궁수병 도용 서서쏴!
실제로 활이 쥐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수천년의 세월 속에 활은 썪어 없어져 버렸다.
활을 사용하기 쉽게 갑주가 아닌 간편한 복색이 특징이다.
박물관 전차
3호갱에서 발굴된 전차이다.
실제 크기의 1/2인 이 전차는 당시의 마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이라 3 황제의 무덤을 보면
이연결이 연기하는 진시황은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똑똑하고 강인하다.
무녀의 저주로 스르르 미이라로 묻힌 그는
불멸의 샘물을 마시고 잠에서 깨어난다.
여기서 본 병마용과 똑같은 모습으로...
병먀용을 보았을 때 자꾸 이연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일제히 활을 들고 앉아 쏴. 서서 쏴를 외치며
활비를 퍼붇는 영상이 지나갔다.
4륜 마차를 탄 진시황이 병사들을 이끌고 진두지휘를 하고
휘이잉~ 따그닥따그닥 말발굽 소리와
진나라 군사들의 함성 소리도 들린다.
살아 움직이는 병사들을 본다.
난 진시황의 병사 중에 입을 앙다문 녀석이다.
처참한 전쟁 시나리오를 쓰며
나는 상상속에서 토용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인다.
6천여명의 병사들의 함성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1984년 병마용 참관을 마친 레이건이
기념촬영을 마치고 돌아서서
병마용 군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해산(dismiss)!".
병마용갱을 나오며 나도 외친다.
'해산! 그대들의 임무는 끝났다. 부디 흙 속에서 편히 잠들라!'
세계사를 돌아볼 때
대제국의 왕들 중엔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고 싶은 욕망으로
사후 자신의 묘를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 이가 많았다.
그런데 웅장한 묘 축조에 국력을 낭비한 이들의 공통점은
그로 인해 자신과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진시황릉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만들기 시작,
그가 죽은 후 완공하기까지 38년이 걸렸지만
진시황릉을 만든 진(秦) 왕조는
고작 왕조(통일왕조) 창건 15년 만에 멸망했으니......
내가 3년 전에 다녀온 인도의 예를 봐도 그다.
고대 인도의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로 칭송 받는 타지마할을
무려 22년에 걸쳐 만들었다.
타지마할은 샤자한 황제의 황후 무덤인데,
국가 재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돈을 쏟아 부어 만들어 놓고,
자신은 아들로부터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절대 권력은 절대 망한다는 진리를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도 좀 알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내려오면서 구수한 군고구마로 호기심을 달랬어요.
아주 달고 맛있었다.
안녕 황제여!
셕류
가이드가 흥정을 해서 홍시 5박스 석류 2박스를 샀다.
가이드와 기사아저씨 한 박스씩 주고
우리는 저녁에 그거 먹어치우느라 힘들었다.
서안 애금해온천입니다.
온천의 지하로는 양귀비가 온천을 즐겼던
화청지의 온천수맥이 관통되고 있으며
온천수에는 다양한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특급수질 온천입니다.
26가지의 다양한 품격과 기능이 살아있는 노천온천이며
따뜻한 햇살과 싱긋한 풀냄새,
아늑한 꽃향기가 가득한 대자연속의 노천온천입니다.
심장이 약해서인 지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그래서 온천욕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따금 하얀 눈을 맞으며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장면을 봤을 때
멋지다!
나도 한 번 해봤음 하는 호기심이 생겼지요.
몇년 전에 뉴질랜드 여행에서 유황온천욕을 했었네요.
날씨가 따뜻했고 유황냄새가 심해서
온천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군요.
꿈꾸던 장미꽃잎탕, 닥터피쉬탕을 경험했네요.
물고기 한마리가 발뒷굼치를 콕 쪼아댔어요.
아,
뭐랄까...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간지럽고, 적당히 이상했어요.
첫키스 기억처럼...
첫사랑의 기억처럼..
첫눈이 내릴 때처럼...
첫월급을 받을 때처럼...
온천욕 후 개운한 몸으로 현지 샤브샤브를 먹으로 갔다.
개별적으로 나오는 육수에
원하는 재료로 쏘스를 만들어 찍어먹는건데
우리 나라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분좋게 한잔 걸치구요.
호텔에 와서 석류알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석류를 실컷 먹었어요
(석류즙이 카펫이나 침구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아
석류값의 몇백 배를 변상해야한다는 가이드 말 때문에..)
'紫雲英 in China ' 카테고리의 다른 글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명나라의 城壁에 기대어... (0) | 2011.02.27 |
---|---|
무림 최고의 고수를 만나련다-화산에서 (0) | 2011.02.20 |
세기의 로멘스 -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탐하다.| (0) | 2011.02.10 |
비의 숲에서 그윽한 묵향이 흩날리고....비림 (0) | 2011.02.04 |
장안의 중국 문화의 맛을 보다(문화광장,이슬람거리,고씨장원, 덕발장교자) (0) | 2011.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