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雲英 in China

비의 숲에서 그윽한 묵향이 흩날리고....비림

올레리나J 2011. 2. 4. 18:54

중국에서 첫날밤을 보낸 서안 세라톤 호텔




새로 구입한 광각렌즈로 잡은 호텔 세라톤...
 
 



토끼해를 맞이하여 대길을 바라는 토끼 ..
호텔 앞 조형물 치고는 너무나 조잡한 느낌이...
어디까지나 나의 미적 기준에서 보면...







토끼 토(兎)자를 형상화해 놓은 모양이네요
역시 중국인들의 붉은색 사랑은 대단하대요.
간판들이 온통 빨강색 물결~~~~




서안은 날씨가  좋지 않아요.
연중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다네요..
“개 짖는 날이 해 뜨는 날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래요
해가 뜨면 개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짖는다는 뜻이고.
연평균 강수량이 600㎜ 정도 밖에 안 되니 건조하고,
그래서 먼지도 많겠지요.
하늘 색이 실종된 나라라는 느낌에
내가 중국여행을 꺼리기도 했는데
방대한 문화유산과 거대한 자연경관이 
모든 부정적인 이유들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어요.
 
 


마지막날 일정에 올라갈 예정인 서안성벽
포를 쏘는 구멍이 뚫려 있는 걸로 보아
지금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나봐요.




전,예,해,행,초..
미술시간에 줄기차게 외웠던 기억이 전부인 문외한이지만
거리의 간판글씨도 내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관공서의 현판이나 공문 글씨채는 주로 해서체,
상업적인 간판에는 예서체,
행서,초서,전서의 경우는
서예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중국 서예가들은 예서체를 즐겨 쓰기도 한다는데
우리 한글의 세련되고 예쁜 글씨체는 많이 봤어도
한자체는 거의 접하지 못하다가
비림에서 그리고 여행중의 간판들을 보고
한자체도 정말 다양하고 이쁜 글씨체가 많음을 알았네요.
















서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비림은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세워졌다고 해요.
현재 한(漢)대부터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비석과 1천 여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비석들이 모여 마치 숲을 이룬 것 같다 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대요.
총 3000여 개의 비석이 있으며,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구요.
서예에 관심이 있거나 관계있는 학자들은
비림에서만 3박4일을 보내도 모자란다는 가이드의 말씀...







입구에는 목패방이 있고
여기서 삼문 사이에는 반원형의 연못 분수가 있어요.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을 걸쳐 얻는 지식은 완전한 원형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
의미를 담아 반원형으로 만들었다고 하구요
비석의 글씨체를 탐구하고 공부하려고
많은 유생들이 비림을 찾았을 때
이 다리에서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대요.







원래 이곳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묘인데
가운데 문으로는 급제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
그렇게 유명한 왕희지는 몇 번이고 낙방하여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대요.
오른쪽이 보통 사람들이 들어가던 문.



우리는 장원급제라도 한 것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가운데 문으로 들어갔어요




무엇이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안내할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훑어봅니다
 



우선 입구에서 단체로 인증샷을 날려주시고...



멀리 비림의 비각이 보이네요.



비림이라...비석의 숲이라...
일정표에 있는 비림이라는 글씨를 보고 상상하길
'넓은 들판에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나보다.'
상상은 상상일 뿐...비석의 박물관이었어요.
비림이라는 한자에서 느껴지는 고품격 이미지
난 참 좋네요.




▲ 끝내 점을 못 찍은 임칙서

'비림'이라고 적힌 현판을 자세히 보면,
'碑'의 머리에 점이 찍혀 있지 않아요.
이 현판은 청나라 때 영국에서 들여온
아편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유발시킨 임칙서가
 쓴 것으로 실수로 획 하나를 빠뜨렸대요.
임칙서의 망국을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편전쟁이 패배로 돌아가자
서안의 서쪽 신강지역으로 유배되었고
임칙서는 유배가 풀려 돌아오면
미처 못 찍은 점을 찍어주마고 약속했지만,
끝내 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恨이  서려있군요.



내가 올라가서 화룡점정 할까요?
그냥 보고 있자니 어쩐지 답답하네요.
 



비림의 현액이 걸려있는 이 곳이 석대효경정입니다.
높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석대효경비(石台孝经碑)'가 있어요.
<효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효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이구요.
큰 글자는 당 현종 때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이고,
그 밑 작은 글씨는 현종이 해서체로 쓴 주석.
석대효경은 효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라네요.

양귀비와의 열애로 역사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현종이지만
시와 서예, 음악에 능하고
미술 애호가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니...
참 로맨틱한 현종이었네요.
 
 


당 현종 때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
예서체라...단정하면서도 웅장하여 느낌이 좋네요.



▲피휘결획(避諱抉劃)-'民'자의 마지막 획을 긋지 않았다
석대효경비문에는 피휘제도(避諱制度)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어요.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 가운데
'民字'를 쓰면서 피휘하는 의미에서
'民字'의 마지막 획을 긋지 않았대요.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조상의 이름자를 쓰겠느뇨?
참으로 과한,격한 무한 공경이네요



▲피휘결획(避諱抉劃)-'治'자의 마지막 획도 긋지 않음
당태종의 조부인 고종 이치(李治)의 이름 가운데
'治字'를 쓰면서 역시 피휘하는 의미에서
'治字'의 마지막 획도 긋지 않았대요.

 
석대효경정 앞에서...



대안탑에서 본 용형체를 닮은 회나무를 여기서도 만났어요



본격적으로 비림을 파헤쳐볼까요?



비림을 향해 앞만보고 걷는게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내 피사물로 다가옵니다.



비림의 일출이지요



앙상한 가지 사이로 수묵화처럼 비림의 해가 솟아오릅니다.



때론 이런 장난스런 포즈도 잡아보구요...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천년의 역사를 뛰어넘는 듯...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날아가는 듯...
속세에서 극락으로 가는 듯....
내가...내가 아닌 듯



스산한 겨울에 황매 봉오리는 작은 기쁨으로 다가오고...
난 기꺼이 그를 맞이하지요.


 
▲중국을 대표하는 종소리, 경운종

이 종은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경운종'
높이 약 2.5m, 둘레 약 1.7m의 이 종은
6톤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주물.
당 예종이 직접 쓴 292자가 종에 새겨져 있고
그 내용은 도교와 종소리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구요.

중국 CCTV에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경운종 소리를 녹음을 해서 내보낸대요.
 
기계음을 통해서 듣는 것보단
실제 타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듣는 보신각 종이
'더 깊은 울림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양쪽에 팔각누각을 거느린 이 길
참 세련되어 보이지요?



팔각누각(八角樓閣)






 
▲ 동양에 기독교가 최초로 언급된 유적인 대진경교류행중국비

이 비석은 무척이나 중요한 비석으로
781년 당나라 때 세워졌는데
서구 로마를 대진(大秦),
대진의 종교를 경교(景敎),
즉 기독교도 소개하고 있고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가
중국에 소개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비석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에 전해진 과정과 교리가
고대 로마문자로 적혀 있어요.
서구의 기독교가 언급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이 비석을 근대에 처음 발견한
'윌슨이라는 영국인은
이 비석을 영국으로 가져가고자 했지만,
중국에서 이를 허가하지 않았대요.
윌슨은 이 비석을 탁본하여,
영국에 재현품 4개를 만들어 세워 애지중지 한다는데.
희소성 때문인지 여기서는 극진한 대접을 못받는 듯 하네요.
 유리안에 보관되어 있는 비석들도 있는데
이건 그냥....
만질 수도 있어요.
촉수엄금이라 말도 없구 누가 제재하지도 않고....







▲ 비석을 모아놓은 창고 같은 비림

비림에 들어서면 놀라게 되는 것이
역사적이고 오래된 귀중한 비석들이
마치 창고의 물건들처럼 전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져도 되고, 긁어도(?) 될 것 같아요.ㅋㅋ.
여긴 유리장 안에 진열되어 있어요.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이수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대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이런 모양을 쓰기 시작했대요.
물론 중국의 영향이겠지요.
 
 


여기에 살짝 앉으면 건강하게 오래살 것만 같았어요.
ㅋ..이걸 보고 있던 공안이 앉지말라네요.
반짝반짝 닳고닳아 앉아도 되는 줄....
우리 문화재를 이렇게 대한다면 노발대발 할거면서...



풍화된 비



남이 흉내내지 못하는 왕희지만의 필법이 나타난 비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비림에서 다 만나뵙네요.
 
서예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중학교 미술시간에 열심히 외웠던
구양순체, 왕희지체, 안진경체...
그 명필가들의 필체가 비림에 가득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손끝의 떨림...
장인의 정 끝에서 다시 숨쉬는 글씨체...
구경하는 자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
.
.















탁본 중인 집자괴성점두도(集字魁星点斗圖)
正心修身 克己復禮의 8글자가 새겨짐
(찾아보기도 힘들어..)
왼손으로 벼루를, 오른손에는 붓을 쥐고 있으며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올려
'斗'자를 받치고 있고,
다른 발은 '鰲'위에 올려져 있어
형상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했어요.








비림에서는 원하는 사람에게 탁본도 떠줍니다.
물론 돈을 받구요.
이 귀한 유적들을 함부로이 다루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어요.
무한탁본으로 언젠가는 닳아서 없어질 게 분명한데...
워낙 많아서 인가요?
 


탁본품


 
▲  관우의 암호편지인 '관제시죽(關帝詩竹)'

관제(關帝)는 의리있고 용맹한 덕장(德將) 관우(關羽)를
후대에 제왕(帝王)으로 높여 부르는 호칭이랍니다.
 
삼국지의 관우가 조조에게 잡혀 있을 때
유비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인대요.

관우는 조조가 알아보지 못하게
대나무 그림을 그려 보내면서
대나무 잎을 교묘하게 글자로 암호처럼 적었대요.
물론 이 비석은 관우가 직접 적은 게 아닐게고
누가 봐도 대나무 잎이 무슨 글자인지 다 알아보겠고...
(조조가 일자무식이 아닌질대..)

하지만 관우를 왕(關王)으로 모시는 중국인들에게
이 비석의 탁본이 가장 인기가 높다네요.




유비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죽엽(竹葉) 그림으로 운치있게 표현한 글로 유명한 관제시죽 탁본

그 내용을 살펴보면 不謝東君意 불사동군의
(동군(조조)의 후의에 감사하고픈 마음은 없네)
丹靑獨立名 단청독립명
(홀로 붉은 마음으로 청청한 이름을 세우려 하네)
莫嫌孤葉淡 막혐고엽담
(다른 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외로이 남은 나뭇잎을 싫다 하지 말게)
終久不凋零 종구불조령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니)



단천자문(斷千字文)
당대 장욱(張旭)이 쓴 글씨체로 호방하면서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단다.
 








달마동도(達摩東渡)
달마(達摩)는 남천축(南天竺; 지금의 인도)
왕자(王子)로 성(姓)은 찰제리(刹帝利)
서기 520년 양무제(梁武帝)가 달마를 금릉(金陵)과 담불리(談佛理)에서 맞이하여
광주(廣州)에 도착하였지만 서로 견해가 달라서
달마는 강(江)을 넘어 하남(河南)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로 들어가
9년간 면벽(面壁)하여 선종(禪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대요.
달마도는 1628~1644년 명대(明代) 말기의
풍전(風顚) 이라는 승려가 그린 그림으로
어깨에 망혜(芒鞋)을 짊어지고 동(東)쪽으로 가는 형상이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달마도...



달마 탁본



달마면벽도(達摩面壁圖)



탁본










 
▲   태백산전도(太白山全圖)

태을산(太乙山) 이라고도 부르는 태백산은
섬서성(陝西省) 에 있으며 해발 3,767m.
산세(山勢)가 험준하고 산봉우리가 겹겹이 쌓였음.
산이 높고 계곡이 깊고 만년설(萬年雪)이 쌓여
태백(太白)이라 이름 지었으며 관중 8경(關中八景)중의 하나다.
이 그림은 청나라 강희(康熙)39년에 가립(賈鉝)이 그렸고
이사룡(李士龍), 복세(卜世)가 조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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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안석각예술관

비림에는 비석만 있는 것은 아니고요.
각종 석조 조각 유물도 전시되어 있어요.



석각예술관 앞뜰



이 부조는 당나라 황릉을 장식하던
화려한 석조각품
그런데 4개의 부조 중 2개는 망가진 채로 전시되어 있고,
2개는 온전한 형태로 전시
4개의 부조 중 2개를 서양의 군대가 약탈해 갔답니다.
망가진 2개는 남아 있는 진품이고.
온전한 2개는 약탈로 사라진 부조를 재현해 놓은 것이구요.



그 중 10여톤에 이르는 거대한 코뿔소 조각상이 눈길을 끄네요.
이 것은 당 고조의 무덤 앞에 놓여 있던 조각상으로
베트남에서 조공으로 바친 것이고
무덤의 석각 구성물을 옮겨 놓았다네요.


























 
▲  낙타를 묶어놓았던 기둥



비림의 마당에 즐비해 있는 이 조각상들은
당나라 때 실크로를 통해
서역에서 가져온 온 것들입니다.
각종 표지 비석인 이 돌기둥에
대상들은 낙타의 고삐를 매어두곤 했겠지요.
지금도 묶어 놓았던 곳이 고삐에 닳아
움푹 들어간 흔적이 보이네요.


 
▲ 기둥 위의 각기 다른 조각상들



사진찍고 있는 모습을 또 찍었나 봐요.
낙타 말뚝이 예뻐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낙타 말뚝도 모아놓으니 에술이네요
낙타 말뚝 조차도 돌로 조각하는
그 옛날 그들의 예술감각과 심미안에 박수!



중국의 신비로운 대자연이 중국의 산수화를 탄생시켰나봅니다.



석각예술관 회랑에 산수화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어요.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일진대.....



눈이 호강을 하네요



















남편이 이 그림 앞에서 나를 부릅니다
너무나 멋진 그림 한폭이 있으니 빨리 오라구요
여자인 내가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저런 허리를 갖고 싶었습니다.ㅎㅎㅎ







황산을 산수화로 만나네요.
 명나라 서하객(徐霞客)이 일찍이 황산에 올라
온 누리에 휘주의 황산만한 곳이 없다.
'황산에 올라 천하에 산이 없음을 알아 보기를 그만두었다.'
라고 천고에 남을 찬탄을 했다.
후세에 어떤 이가  이 문구에
 '오악을 보니 다른 산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황산을 보고 오니 오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단다.
오악 중인 화산도 멋지더만...
언젠가 황산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사람은 숲속에 있고 숲은 사람 속에 있도다.
만약 그림과 같은 풍경을 원한다면
푸르게 푸르게 먼저 행해야하리'

일행 중 멋쟁이 한문 샘이 해석하고 찍은 비림에 있던 푯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던가
'나무를 꺽지 마시오.'
또는 '자연은 사람보호, 사람은 자연보호'
라는 우리의 환경보호 켐페인과 같은 푯말인 듯... 

강압적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부정적인 글귀보다
이 얼마나 은유적인 표현인가?
들어가기는 커녕
꽃씨를 뿌리고 식수라도 하고픈 맘이 들었다니까요.



비림의 묵향은 모두에게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나 봅니다



속세로 나가는 뒷모습조차 그윽합니다



"어땠어요?" 가이드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너무 좋았어요."



기와 잡상



서안의 문화가 담긴 티셔츠







들어갈 땐 못 본 나무
기와를 뚫어버리는 그대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무얼 찍고 있을까요?



반원형의 연못에 있는 분수대를 담았어요.



혹자는 계림관광은 눈이 피곤하고
서안관광은 귀가 피곤하대요.
계림은 산수를 구경하는라 눈이 바쁘고
역사의 도시 서안은 들을게 많아
가이드의 강의를 듣느라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요.
들으면 무얼하랴?
한쪽 귀로 들어오고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 버리는걸....
젊은날의 총기는 다 어디로 가고....
기억력이 한시간을 버티지 못하니..ㅉㅉㅉ
그렇지만 내 감정선은 비림으로 인해
고고해지고 그윽해지고, 가방끈이 길어진 듯
뿌둣하기만 했다오.
그윽한 묵향에 취해 마음까지 고요했던 비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