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날이다.
일정에 없던 서안성 관광을 웃돈을 지불하고
올라가 보기로 했다.
서안 여행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성을 올라가보지 않는다면
어디 서안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성 밖 매표소 앞)
서안의 성곽은 세계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어서 아주 유명하다.
지금의 성벽은 당나라 때에 쌓았던 것을 기초로 해서
명나라 때(1374년)에 다시 축성한 것이다.
그리고 1982년~84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성문을 지나자 나오는 공간은
소위 옹성(瓮城)이다.
성문을 열고 적군을 성 안으로 유인한 다음
성문을 닫으면 적군들은 꼼짝달싹 못하고
독 안에 갇힌 쥐 신세가 되는 철옹성...
철옹성이란 낱말의 이미지를
내 머리속에 구체적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는데
그 쓰이는 용도가 모두 달랐다고 한다.
황제 출입문인 남문,
사절단이 출입하는 북문,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생필품,
곡식 등 공물이 들어오던 동문,
그리고 실크로드 방향으로 있는 서문은
서역과 유렵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하였다고 한다.
지금 사진은 동문인 장락문
철옹성에 갇힌 관광버스들....
계단을 통해 성벽으로 올라가다
긴급사항을 전달하는데 사용했던 종
조선족 가이드
성위에 올라와서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하던 좁다란 길이 아니었다.
4차선 정도의 넓고 긴 길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성의 동서길이가 4,200m,
남북길이가 2,700m로
동서 길이가 남북길이 보다 길고
성의 높이는 12m,
성의 바닥 폭은 15~18m이고
성 위의 폭은 12~24m나 된다니...
성 밖의 공원과 아파트
4차로 정도의 넓은 폭의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약 14킬로미터!
인민폐 50원이면 탄다는 전동차로 1시간 가량 걸린다고.
성벽 아래
공연 준비를 하는지 운동삼아 하는지 부채춤을 춘다.
나도 그들처럼.....
누각
성 안쪽 성벽 밑 노점상
야채상
과일상
오른쪽은 성안 왼쪽은 성밖
우리는 걷고 있지만 자전거를 빌려타고 돌 수도 있다.
자전거는 한 시간에 인민폐 20원
페달을 둘이서 밟는 2인용 자전거는 40원
성 안의 건축물들은 색깔과 지붕 모양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음을 느낀다.
지붕은 대개 당대의 모양
오른쪽 성벽아래 네모의 구멍들은
침입하는 적들에게 화살을 쏘는 타구이다.
이 타구가 무려 5,894개나 된다고.
타구방향 쪽은 성 밖이고,
타구가 없는 왼쪽은 성 안
서안성 종 모양의 쓰레기통
성벽에 기대어 잠시 천년 전의 숨결을 느껴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성 둘레길을 사이에 두고
성밖에는 눈부시게 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을 공장의 연기로 보여준다.
해자 넘어 자동차길
뒤에 보이는 제일고성문"(第一古城門)
그 크기가 정말 대단했다.
제일고성문"(第一古城門)의 측면
철옹성
우리 나라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매듭
역사시간에 많이 들었던 신라 말의 최치원
통일 신라 말기
12살 어린 나이로 당(唐)나라에 가서 공부하여
16살에 당 정부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합격,
벼슬을 지내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는「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던 최치원(崔致遠)은
지금으로부터 1,150여 년 전에
서안에 갔던 사람이다.
안사의 난으로 거함 당(唐)왕조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다가
이후에도 당은 150여 년간을 버텼다.
결국 907년에 이 황소의 난으로 망하게 된다.
실제 주전충(朱全忠:본명 朱溫)에 의해 당 왕조가 망하지만
그 배경은 황소의 난인데
황소라는 사람은 본래 소금 밀매업자였다.
인간이나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소금일게다.
지금은 천일제염이 만들어지고
운송 수단이 발달해서 값이 싸졌지만,
과거에는 그야말로 금값이었다고 한다.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값이 싸진 것은
아마도 이 소금이 유일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바닷물을 끓여 만들던 소금이나
내륙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었던 이 소금을,
일일이 사람이 지거나 마차로 끌고 들어와야 하니
내륙으로 들어올수록 값은 비싸질 수 밖에....
‘샐러리 맨’이라는 용어도 로마시대에
병사가 노동력을 제공하고
소금(salt)을 사도록 돈을 지급한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담배를 전매청에서 전매했 듯이
당대(唐代)에는 소금을 국가에서 전매했다.
정부에서 재정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소금 값을 인상하여
필요로 하는 재정을 확충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매제도로 인해 생겨난 것이
소금 밀매업
. 밀매업자들은 소금을 만들거나 구입해
정부 고시가보다 싸게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
그러니 정부에서 본다면 이들은 언제나 암적 존재였다.
그래서 잡히면 매우 엄하게 처벌했고
법이란 것은 엄해 지면 질수록 범죄라는 것도
그에 비례해서 치밀하고 악랄해지게 마련
마치 요즈음의 마약 밀매업자처럼
이들 또한 막강한 조직력과 막대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당 말의 여러 불만층과 합세하여
새로운 꿈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황소의 난’
황소는 실제 장안에 스스로 대제(大齊)라는 정권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기반의 약화로 3년 후
산동의 태산(泰山) 부근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이 난은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전충은 황소의 부장(部將)이었으나,
882년 형세의 불리함을 간파하고 관군에 항복하여
당의 희종(僖宗)으로부터
전충(全忠:온전하게 충성하라)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그는 후에 기회를 엿보다가,
당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제위를 양위(讓位)받아 양(梁)나라를 세우고
개봉(開封)으로 수도를 옮긴다.
이로써 당 왕조는 망하고
이후 장안(서안)은 중국사에서 수도가 된 적이 없다.
전성기 때의 서안은 아마 지금보다 더 화려했을 것 같다.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서역인들과
서역의 여인들이 도우미로 있는 주점,
호객 행위를 하는 녹색 눈의 아이들,
서역인이 운영하는 라면(拉面)전문점과
청진(淸眞)반점이라고 쓴 각종의 회족음식점.
거대한 청진사의 예배의식,
밤마다 시장에선 울타리를 쳐놓고 공연하는
서역인의 각종 공연과 마술,
무대에서는 천연 화장품으로 짙은 화장을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위구르 말로 노래하는
미모의 가수와 뇌쇄적인 율동으로 춤추는 무희들,
온갖 세상 물건을 파는 시장과 백화점,
이권을 둘러싼 조폭들,
소매치기와 장물애비도 활동했을 것이고,
수도 장안에서는 치안 유지를 위해
통금과 야경꾼들이 순라를 돌았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최치원의 과거시험 합격에서 볼 수 있듯이
당(唐)은 외국문물을 적극 받아들였으며,
외국에서 온 인재를 선발하는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를 시행해 이들을 등용했던 것
마치 지금의 미국처럼,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를 돈과
좋은 대우로 미국에 잡아두는 것처럼....
고인 물은 썩게 마련
명왕조의 경우에는 장성을 쌓고
해방(海防)이라 하여 바다무역조차 오랜 동안 금지시켰다.
청 왕조 후기에는 조공만을 고집하고
차와 도자기만 팔아먹을 줄 알았지
문을 걸어 잠갔다가 결국은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지게 되고,
서구 열강으로부터 식민지화 되어 갔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다.
‘양이’, ‘척화(斥和)’, ‘위정(衛正)’만을 고집하다
시류에 밀려 스스로 개화해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당 왕조는 외래 문물을 당당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활용하였으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다.
그만큼 화려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성당(盛唐)이라고 하는 전성시대에
100만의 인구가 생활하던 당시 세계 최대의 수도 장안에는,
육로(실크로드)와 해로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상인과 사절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단순히 인간만이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과 사상, 종교도 함께 가져왔다.
이러한 문명이 장안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다.
장안(서안)은 성(城)이 쌓여 있던 성곽도시다.
내몽고 호호트를 청성(靑城),
북경을 경성(京城)이라 부르듯이
서안은 고성(古城:옛 성 도시)이라 부른다.
서안성의 남쪽 정문은 승천문(承天門),
황성의 정문은 주작문(朱雀門),
주작문으로부터 남쪽으로 폭 150m의 주작대가(朱雀大街)라는
시내의 중심 도로가 나 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시내는 동가와 서가로 나뉘는데,
서가는 또 110개의 구역으로 나누었고,
동서 양가에는 각각 동시와 서시라는 큰 시장이 있다.
당현종은 황자시절에
동가 동시의 북쪽에 있는 흥경궁(興慶宮)에 살았는데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의 흥경공원이 그 때의 흥경궁 터
그러나 당이 망한지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러한 당대의 성벽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재 서안시 여기 저기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성벽은 명초 즉,
14세기 후반에 쌓여진 것이고,
규모 또한 당대에 비해서 훨씬 작다.
당말, 장안은 주전충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당이 망하기 3년 전(904) 절도사 한건(韓建)은
황성을 중심으로 작은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명대에 수축한 것도 거의 그 스케일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것을 이어받은 것이 현재의 서안시
지금 시내에 있는 종루와 고루도
명초에 만들어진 것이고,
현재 서안이라는 명칭도 명대부터 쓴 것
성(城)이란 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도심 속의 성,
성 주변에 파놓은 해자와 수양버들,
6백년 고도(古都)의 겨울에 맘껏 취해본다.
이번 여행은 참으로 먹거리가 풍부한 여행이었다.
먹는 걸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위기에 따라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있다.
병마용갱 나오면서 먹었던 구수하고 튼실한 고구마
한 집에 한 박스씩이나 안겨준 땡감 홍시(다 먹어치우느라 힘겨웠음)
회족거리에서 사온 아주 큰 대추(살이 많아 퍽퍽했고)
100% 석류 쥬스의 난동으로 얼룩 진 최샘의 옷들...
보기만 좋았지 먹을 수 없었던 떡처럼 생긴 빵.
배가 터져도 맛있었던 컵라면.
통잠으로 여행자의 피곤을 풀게 해주던 포도주와 소주
가이드가 사다 준 양,소 꼬치구이와 닭날개
태어나서 최고로 맛있었던 중국 귤
그리고 우리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자줏빛 속살의 달콤한 유혹 석류!
석류즙이 침대나 호텔 카페트에 물들면
석류값의 몇백배를 물어내야 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한알이라도 흘릴까봐 신문지 바닥에 깔고
무릎에 깔고 조심조심, 한알한알...
아니면 통째로 한입...
한알 흘리는데 만원씩 벌금을 걸어놓았으나
조심하니까 긴장해서 더 흘리게 되더라는....
그래도 석류 한 박스가 남아 서안성에서는 남은 석류 먹겠다고
향희씨는 계속 석류박스를 들고 다녀
이를 보다 못한 김샘이
성벽에 올려놓고 한바퀴 돌아나오면서 먹자했다.
석류를 사수하라!
아무도 관심갖지 않을거라면서도
계속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던 모양이다.
때마침 서안성 청소부가 석류 곁으로 다가가자
석류를 사수하러 두 여인이 뛴다.
왼쪽 성벽에서 석류박스를 내리는 청소부 아저씨가 작게 보인다.ㅋㅋ
남아있는 우리들은 응원하면서도 배를 잡고 웃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렇게 무사히 철옹성에서 석류 구출에 성공해
박스를 열어보니 바알간 석류가 활짝 웃고 있다.
언손 호호 불어가며 입속으로 들어가는 달큰한 과즙에
우린 정말 행복했다.
호텔에서 조심스레 먹었던 일을 떠올려
복수라도 하듯 험하게 먹었더니
알알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한 알 한 알 주워서 뒷처리는 깔끔하게!
석류박스가 누가 버린 쓰레기인줄 알았을까?
청소부 아저씨는....
종루(종루)와 고루(鼓樓)는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서 가장 크다.
종루와 고루는 서로 500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성안
용모양의 깃대
서안은 성곽도시다.
몇 년전 세계성곽도시시장(市長)회의가
경기도 수원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이때 중국의 서안과 남경,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스페인,이태리 등 성곽도시 대표들이 참가한 바 있단다.
서안 성곽에 한 번 올라가 본 것으로
한 바퀴에 거의 14km 나 되는 서안 성곽 중
극히 일부만 보고 다 봤다고 할 수는 없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중추가절에
자전거나 도보로 한 바퀴 돌고 싶다.
중국은 워낙 넓어서인지 성곽이 발달 했나보다.
삼국지만해도 서로 죽이고 죽고...
살기 위해서는 성을 튼튼히!
철옹성처럼 성곽을 튼튼히 쌓았다해도
국정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쉽게 무너진다.
만리장성을 쌓았다해서 외침을 잘 막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지....
하루에 한번 꼴로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사람도, 차도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서안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비해 아주 작고 아담했다.
작아서 구경할 것도 별로 없었다.
쵸코렛 몇 개 샀다.
서안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찍은 황토고원
내몽골고원의 남쪽에 위치한 황토고원은
면적이 약 40만 제곱킬로미터로서
중국에서 세번째로 큰 고원이며
평균 해발은 800미터에서 2천 미터에 이른다.
북으로는 만리장성으로부터 남쪽의 진령산맥까지,
동쪽으로는 태항산으로부터 서쪽의 치롄산까지 걸쳐 있으며
청해, 감숙, 영하, 섬서, 산서, 하남 등의 여러 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곳은 세계에서 황토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
고원의 약 60%가 황토에 덮여 있는가 하면
그 대부분 지역이 50미터에서 80미터 두께의 황토로 덮여 있다.
이렇게 넓은 면적에
아주 두껍게 황토가 덮여 있는 것을 보면
대자연이 이룬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황토고원은 가로 세로로 뻗어 있는
수많은 계곡 때문에 지세가 평탄하지 않다.
장관을 이루는 흙기둥과 기이한 봉우리,
그리고 요동이라고 부르는 동굴집과
민족적 풍치로 인해 각지로부터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황토고원의 황토는 대량으로 비에 쓸려나가 황하에 퇴적되고 있다.
현재 고원 표면의 수분과 토양의 유실이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고원 곳곳에 많은 구덩이가 생기고 있다.
과학자들은 황토의 토질이 푸석푸석하여
흐르는 물에 의한 침식 작용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황토고원에 내리는 비는 대부분
침식력이 강한 폭우이기 마련이다.
여기에 불합리한 토지 이용과 남벌,
무차별적인 개간 등의 인위적인 요소도
수분과 토양의 유실을 더욱 더 심하게 만들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농지를 숲이나 초지로 되돌리는 조처를 실시하여
황토고원 상의 수분과 토양 유실을 막아내려고 하고 있다.
드뎌 인천공항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단체로 마지막 기념샷
50획이나 되는 한자 '병'
식당에서 자주 봤다.
우리 발음으로 ‘병’이라 읽고,
중국어로 ‘비앙(biang)’으로 발음하는 50획이나 되는
희한한 모양의 한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강희자전에도 안 나오는 난해한 글자란다.
'비앙'은 우리말로는 국수란 뜻의 섬서 지방 음식명이다.
초재진보와 같이 조합한 글자로 보이는데,
초재진보는 넉 자에 불과하지만 이 글자는 무려 열 자나 된다.
글자 밑에 그 글자에 대한 풀이가
시적인 문장으로 적혀 있다.
"한 점이 위에 있고, 황하가 두 갈래로 굽이친다.
'八'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言'자가 그 속을 달리네.
네가 돌면 나도 돌아 앉고,
네가 길면 나 또한 길구나.
중간에 왕을 대신하여 '馬'를 넣고,
'心'은 달 아래 앉아 있다.
칼을 잡고 참깨사탕[麻糖]을 걸어두고,
차를 타고 함양(咸陽)으로 놀러간다."
대륙 기질을 가진
중국인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재물을 불러들이고 돈이 불어난다는 초재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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