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은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꼽히는데,
과거 동서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었고,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도읍으로 삼거나
정권을 세운 곳이었던 까닭에 수많은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어요.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서안은
오랜역사를 함께 해온 고성벽과
돌로된 서고(書庫)라 불리는 비림, 대안탑, 소안탑 등의 건축물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 8대 기적' 중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 등
중화고대문명의 진귀한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으니
"오천년의 중국역사를 서안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이 있대요.
수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을 여행할 때 서안이 필수 코스랍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주와 같은 곳이겠지요.
역사 시간에 배웠던 한과 당의 도읍지였던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곳이구요.
중화문명의 발상지이자
중화문화의 대표라고 손꼽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요.
학창 시절 시험용으로 달달달 외웠던 중국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3박 4일 동안 서안을 샅샅이 파헤쳐 봐야지요
식당 근처
공항 근처의 식당에서 중국식으로 점심을 먹었어요.
열가지 정도의 반찬에 밥이 나왔어요.
첫 중국현지식을 맛보는 순간...
짭조롬한게 맛있었지요.
다음 현지식이 기대될 만큼이요.
태국 여행 때도 중국식과 한식이 나왔는데
중국식이 훨씬 맛있었다는 기억이 났어요.
나의 미각세포는 한족이나 티벳족 아니면
위구르족의 DNA로 채워졌나 봐요.
중국 특유의 향신료인 고수가 심하게 들어있지 않는 한
무엇이든지 다 맛있었으니까요.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달려 서안시내로 들어왔어요.
날씨는 우리 나라보다 더 따뜻했고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 나라 중소도시를 지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내쪽으로는 차가 많아 가다서다를 반복했고
길거리의 사람들도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어요.
제일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지요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섬(陝)자는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은 글자로
우리 나라의 좁다는 뜻의 협(陜)자와 비슷해서
처음 나도 협서역사박물관으로 읽었네요.
글씨체가 참 예쁘지요?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한자의 글씨체를 본 것도
굉장히 의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얼마나 이쁘던지요?
그러나 약자가 너무 많아 고개를 갸우뚱 했고
한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후회도 했지요.
섬서성역사박물관은 국가급 대형박물관로써 중국에서 규모가 2번째라네요.
전시실은 7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115만년전부터 기원 1840년 사이의 섬서역사를 체계적으로 전시했고
시대별로 제1 전시실은 선사시대와 주, 진시대
제2 전시실은 한나라와 위진 남북조시대
제3 전시실은 수, 당과 송, 원, 명, 청나라 시대의 유물 전시였어요.
박물관 입구의 중앙 홀에는
당나라 고조의 능에서 나왔다는
매우 큰 돌사자 상이 있어요.
우람한 사자 상 앞에서 한 컷.
박물관의 파수꾼 노릇을 하나봐요.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네요.
고대문명관 - 중국사에서 고대라고 하면, 흔히 하(夏), 은(殷), 주(周) 시대를 일컫는다.
그동안 중국의 역사는 <주(周)나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며,
유적의 발견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중국에 분명 청동기 문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문명이 중앙집권적 왕조를 형성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하, 은왕조가 존재했다면 이는 청동기 시대의 왕조가 된다.
그동안 B.C.2000 전에 시작했다는 <하왕조>와 <은왕조>는
문헌상에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았던 전설 속의 왕조로 여겨졌다.
그런데 1928년경,
은나라의 수도로 알려졌던 하남성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은허(殷墟)>라고 불리는 이 유적의 발견은
20세기 중국 역사의 대발견이었다.
이로써 은왕조가 실제했음이 증명되었고,
중국역사의 시작은
B.C. 1300년전으로 거슬러 인정되었다.
기록에 상(商)이라고도 씌여있는 은나라는,
은허 유적의 연대기보다
300년이 이른 B.C.1600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시작을 더 멀리서 잡기 위해
B.C.1600년 경의 은나라 전기 유적과
그보다 더 앞선 왕조로 기록에 남아 있는
전설의 하나라의 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만주에서 시작되고 있는 <동북공정>과 같이
중국의 전역에서 역사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티베트 지역에서는 <서남공정>이,
위구르 지역에서는 <서북공정>이 진행중이다.
모두 중국의 역사를 확대하고,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며,
아울러 소수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공정으로
<하은주단대공정>이 진행되고 있다.
<공정>이란 프로젝트(project)의 중국식 표현이다.
-황하부근 고대 청동기 문명의 형태를 보여주는 모형-
주나라 시기로 보이는 토기 유적들
아무튼 1980년대에 들어,
<하은주단대공정>의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전설의 고대왕조 하왕조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리두 유적>이라 불리는 발견으로,
중국사학계는 중국사의 시작을 하왕조에까지 끌어올려
B.C.2000년으로 보고 있다.
아직 세계 사학계는 <이리두 유적>의 연대를 모두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B.C.1500년 경 중국에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고조선>은
신화상으로 중국보다 앞선 B.C.2300년 경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위만조선>의 존재가 확인되는 B.C.108년 경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 위만조선 이전에
우리의 고대문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 유적과 조개 장신구)
철기시대,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
주나라는 B.C.250년경에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왕조이다.
수도를 이 곳 서안에 두었던 시기를 서주(西周)시대,
동쪽의 낙양으로 옮긴 후부터를 동주(東周)시대라고 한다.
동주시대부터는 철기가 사용되었고,
철기의 사용은 보다 튼튼한 농기구와 무기의 제작을 가능하게 하면서
국가의 생산력과 국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주나라는 중국 역사상 200년이 넘게 오랫동안 번성한 왕조로,
청동기와 철기문화의 꽃을 피웠다)
주나라는 개국한 때부터,
왕이 수도 주변을 다스리고,
친척과 공신들에게 지역의 봉토를 나눠주고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도>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지방의 봉건영주들과 왕의 관계가
깊고 가까웠으므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을 거듭할수로록,
영주들은 왕과는 혈연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점차 수도에 갇힌 왕의 권력은 작아지고,
얼마든지 땅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영주들의 힘은 커져만 갔다.
결국 강력한 철제무기를 바탕으로,
영주들은 반란과 독립을 일으켰고,
이를 <춘추전국시대>라고 일컫는다.
분열의 초기 영주들은 저마다
<주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패권을 다퉜으나,
점차 <주왕조>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기를 꿈꾸며 천하를 다투었다.
주왕조의 종주권 인정되던 앞선 시기를 <춘추시대>,
명실공히 주왕조가 몰락한 후기를 <전국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영웅들과 제자백가를 물리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 자는 바로,
<진시황제>와 <법가사상>이었다.
강력한 법치주의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국을 통일한 진(秦)나라 왕 <영정>은
천하를 통일한 자신은
그동안 다투어 왔던 여러 왕들보다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고
스스로를 왕이 아닌 황제로 이름했다.
천하를 다스릴 하늘의 운명을 타고 난 황제로서,
"하늘의 아들" 즉 천자로 군림하였다.
천하통일 진나라
진나라의 기본이었던 <법가사상>은
인본이나 천리를 중시하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회를 인식하였고,
철저하게 정비된 법과 제도로서 나라를 운영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법과 도량형, 신분제도가 마련되었다.
정치와 사회는 법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였고,
백성들은 신분에 따라 정해진 복장을 입어야 했으며,
국가가 정한 도량형만 사용해야 했다.
또한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과거의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들을 금지하여,
고서(古書)를 읽은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이에 따라 많은 유학자들이 산 채로 묻히고,
수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분서갱유, 焚書坑儒)
잔인하고 무자비하긴 했으나,
사실 이때에 비로소
실질적인 중국의 전제 왕조 지배질서가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진나라의 법과 제도는 이후
여러 왕조에서 통치에 이용하게 된다.
중국 최초의 황제, 시황제 영정은 똑똑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아들인 자신이,
범인들과 같이 늙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신하들에게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게 한다.
이때 불로장생의 방법을 알고 있다는 수많은 <도사>들이 시황제를 찾아온다.
도사들은 주로 <도가(道家)> 사상가들이었는데
여러가지 연금술로서 불로장생 약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물질을 시황제에게 약으로 권했다.
바로 <수은>이다.
시황제는 점차 수은중독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환정과 환각이 나타나고
판단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착각했다.
마르지 않는 불멸의 물질 수은,
아직 개봉되지 않은 진지황릉에는
중국 전역을 축소해 놓은 땅 모형과
수은이 강물처럼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진시황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작은 산(봉분)은, 토양 속 수은 농도 측정으로 추정해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때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물질을 합성하는 실험을 거듭했던 도사들은,
의도하지 않게도 중국의 기적적인 발명품을 만드는 기초를 제공했다.
진 시황제
바로 화약이다.
이런 것을 진시황의 숨겨진 업적이라고 해야하나...
비록 중국은 이 위대한 발명품을 폭죽이나 만드는 데 썼지만,
유럽에서는 총과 대포를 만드는 데 씀으로써,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수은 중독과 주위의 아부로 총명함을 잃은 시황제가 죽고...
진나라는 얼마가지 않아 멸망하였다.
이어 등장한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패권을 다투었다.
초한의 전쟁에서 유방이 승리하고,
유씨 성을 가진 황제의 나라,
유학을 기본으로 한 왕조, 한나라가 시작되었다.
성인군자의 가치를 존중했던 유교국가답게,
한나라의 유적은 소박하다.
진나라를 끝으로 제 1전시실에서 나와
제2전시실로 향했다.
한(漢)나라는 농민 반란군의 두목, 유방이 세운 나라이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농경문화와 각종 기술발전을 꽃피웠다.
흔히 알려진 <4대 발명품> 종이, 화약, 나침반, 출판기술이 개발되었다.
한나라는 수도를 처음에 서안으로 했다가,
왕망의 반란으로 잠시 나라의 <신(新)나라>에 뺏겼다가,
다시 찾은 후에는 낙양으로 옮겼다.
서안의 한나라를 전한(前漢), 낙양의 한나라를 후한(後漢)이라 한다
실크로드가 당나라 시절에 개척한 교역로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한나라 때 처음 실크로드를 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크로드의 주요 지역인 타림분지는 선사시대부터 이란인종이 이주하여
오아시스 농경과 함께 동서교역에 활발하게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 타림분지의 지형을 볼 때
서쪽의 오아시스를 따라 이 분지를 들어오기는 쉽지만,
중국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는 고비사막이라는 큰 장애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로 가는 루트는
오랜시간 동안 열리지 않고 있다가,
바로 장건 이라는 인물이 중국 최초의 중앙아시아 여행자였다.
그러나 본래 중앙아시아로 가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흉노를 징벌하고 동서교역의 길을 뚫자
동맹을 요청하기 위한 사자로 파송되었단다.
한나라 동서 문화 교류의 시작 인물 - 장건
한나라는 중국인에게 민족의식을 확립시켜준 시기이다.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이 적었다.
이민족과의 접촉도 적었고,
지역으로 분열되었던 혼란의 역사로 인해
스스로 <한족(漢族)>이라는 유대의식이 없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뒤늦게 일정한 국가적 정치체제로 발전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지고,
중화사상을 만든 유학이 정립되어감에 따라
<한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한족>의 명칭도 한나라의 "한"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시대, 위진남북조... 300년의 혼란기
B.C.200년부터 A.D.220년까지 번성한 한나라가 망하자,
<삼국지>로 잘 알려진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거쳐
<위, 진, 남북조>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이후 581년 통일왕조인 수(隋)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중국은 300년이 넘는 분열과 혼란기를 겪는다.
이동안 수 많은 왕조가 여러 지역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중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목민족은 인도와 서역을 넘나들며
많은 외부 문화와 문물을 중국땅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주변 이민족의 결합으로
영토적으로 티벳과 만주, 몽골지역,
동남아시아에까지 중국 문화권이 확장되었다.
당대에 활발했던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무역으로 낙타와 같은 서역문물이 등장함.
당나라에서 유행했던 도자기의 일종을 당삼채라고 하는데
표면에 광택이 나는 도자기로
흔히 세가지 색 이상의 유약을 사용해 구워 문양을 나타내므로
삼채라 불렀구요, 색상은 녹색, 적갈색, 백색을 주로 사용했다.
(당나라 여인들의 다양한 머리모양과 섬세한 화장술에 감탄이 절로절로!)
한족의 전성기, 당나라
중국의 왕조 중에 가장 강대하게 발전했던 나라는
누가 뭐래도 몽고족의 <원나라>이다.
징기스칸과 그 후손들의 원나라는
세계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동양과 서양을 아우른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보다,
한족의 왕조인 <당(唐)나라>를 전성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당나라를 세운 이씨 왕족에
이민족 어머니의 피가 섞였다할지라도...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한족이 세운 한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이민족과의 교류와 교역을 장려하고,
다양하고 발전된 서역의 문명을 개방적으로 수용하였다.
실크로드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주변의 이민족 국가를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 영향력을 중앙아시아와 한반도에까지 확대하였다.
특히 2대 황제인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번영기를 가져오는데
이를 그의 연호를 따서 <정관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 신분에 관계없이 열려져 있는 과거제도가 시행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토지제도와 병역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활발한 교역으로 인해 중국의 기술문화와 학문이 발전하였다.
( 당 실크로드)
한족의 송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강대하던 당나라도
300년의 번성 끝에 멸망하고 만다.
교역을 통해 점차 국력을 키워간 유목민족의 침입에
환관과 외척이 득세하여 국력이 약해진 당나라 조정은
나라를 지켜낼 힘이 없었다.
백성들은 잦은 전쟁과 탐관오리의 횡포로 생활고에 시달렸고
전국에서 반란과 도적떼가 일어났다.
안록산의 난과 황소의 난의 반란을 거치면서
당나라는 쇠약의 일로를 걸었다.
마침내 잦은 반란에 당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은 다시 분열과 혼란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 시기를 <5호16국(五胡十六國)>이라 한다.
200년 동안 5개 민족이 16개의 나라를 세우며.
서로 다투었던 대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를 통일한 왕조가 있었으니,
중국 역사상 가장 힘이 약했던 한족 왕조로 꼽히는 <송(宋)나라>이다.
그나마 송나라는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에 의해 중국을 내어주고 만다.
원나라 이전 잠시 중국을 통일했던 시기의 송나라를
북송, 원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를 남송이라고 한다.
몽고족을 통일한 징기스칸은
중앙의 다른 유목민족들을 통일하고
쿠빌라이에 이르러는 중국까지 그 지배하에 넣는다.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내고,
중국까지 차지한 쿠빌라이는
나라의 이름을 <원나라>로 정하고,
북경에 수도를 두고 중국을 식민지배한다.
원나라는 일종의 종주국으로서,
징기스칸의 다른 후손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칸국>의 좌장이었다.
원나라의 몽고족은 한족을 철저하게 치별하고 지배하였는데...
이로써 몽고족의 원나라는 중국화에 실패하고,
한족과 융화되지 못하였다.
원나라는 세계의 대제국으로 전성했으나,
여러 칸국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종교, 문화적으로 현지화되어,
원나라와 몽고족으로서의 유대의식이 점차 희박해졌다.
종주국인 원나라 역시 소수의 몽고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힘이 부쳤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빗발치는 농민봉기와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몽고족은 다시 북방으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 임금 행차)
몽고족을 몰아내고 다시 중국을 차지한 왕조는
한족의 명(明)나라였다.
원나라의 압정에 대항했던 농민반란군,
홍건적의 병졸이었던 주원장은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홍건적의 지휘관이 되고, 점차 주변 세력을 정벌하여,
한족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이윽고 명나라를 건국하고, 수도를 홍건적의 근거지인 남경에 두었으나
곧 북경으로 옮겼다.
명나라는 초기에 당나라를 연상하는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번성하였다.
특히 영락제 때는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원정을 떠나게 한다.
이른바 정화의 원정>이다.
정화의 함대는 대형 함선이 62척에
인력만 2만7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도시가 옮겨다닌 것과 같다.
형제를 죽이고 피로써 황제에 오른 영락제가,
자신의 반란 중에 행방이 모연해진 조카이자,
전 황제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해
함대를 보내 찾게 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통이 취약한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고,
건국 초기 나라의 위상을 강력하게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다.
아무튼...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를 지나 인도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 동부해안에까지 이르는 먼길을 항해하였다.
항해거리도 거리지만...
<콜럼부스의 대항해>에 비추어
더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콜럼부스가 황금에 눈이 먼 침략과 노략질의 "나쁜" 항해였다면,
정화는 각 지역을 방문하는 동안
침략전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지의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만일 영락제가 죽지 않았다면
정화는 평화로운 대함대를 이끌고
3차 항해에는 아프리카를 돌아 유럽에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금나라의 돌베개 유물)
명나라는 대외개방을 중시했던 영락제가 죽자
영락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득세하여,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전환한다.
또한 명의 영향으로 조선 역시도 괘국정책의 길을 걷는다.
그 사이 유럽은 발전과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다시 한번 정화의 함대가 유럽에까지 갔었다면
동양이 서양을 지배하는 역사가 다시 씌여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쇄국정책과 임진왜란 출병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명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금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국명을 <청(淸)나라>로 고치고
신해혁명으로 봉건왕조체제가 막을 내리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다스린다.
청나라는 흑룡강과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부국강병을 꾀하였지만,
이미 앞서버린 서구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또한 원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중국화에 성공한 탓에,
말타고 벌판을 누비던 유목민족의 기상을 이어가기 보다는,
다양한 유학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유학의 철학적 논쟁은, 비록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서양에 대적할 근대화에는 방해가 되었다.
청나라 말기 황제의 권력은 외척과 환관에게 넘어가고,
서태후의 보수, 부패 정치를 마지막으로 결국 멸망하고 만다
(제3전시실까지 보고 나오는 길)
( 박물관 쇼핑센터 )
(누군가 조그마한을 날리고...)
우리 일행이 제일 많이 날리는 단어는
"대단하다!"와 요즘 애들 용어로 "헐~~~"이었어요.
우리 역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양과
질적으로도 섬세함의 극치더군요.
요즘 인사동 거리에서 팔아도 손색이 없을만큼요.
입이 딱 벌어졌답니다.
나는 문득 한족이 무서워졌어요.
저력이란게..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게...
인해전술을 펼만큼 많은 인구라는게...
공산당으로 똘똘 뭉치는 단결력이란게...
식품에서 자동차까지 못 만드는 짝퉁이 없다는게...
세계의 모든 나라가 중국의 눈치를 본다는게...
중국없인 세계의 경제가 마비된다는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래서 무섭다는거지요.
지금도 서안은 지하 어느 곳에 유물이 묻혀 있을지 몰라
도시개발이 제한되고 있으며,
지하철 등의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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