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의 일상/자운영 책을 읽다

어느 날 문득, 오랜만에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린다면...

올레리나J 2011. 1. 4. 16:39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

 

 

새벽에 편도선이 아파 일어났어요.

모처럼 촐퇴근의 압박감 없이

나름 잘 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봐요.

긴장의 끈을 한꺼번에 놓아서일까요?

입언저리도 부어오르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네요.

9시에 내과에 갔더니 편도선이 많이 부었대요.

소염주사를 맞고 3일분 약을 받아왔네요.

 

약기운에 취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 잠 자고 났더니

한결 나아졌어요.

거실로 나왔더니 따사로운 햇살이 깊숙이 들어왔어요.

누워보니 발끝에서 머리까지 햇살이 덮어주네요.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연휴라 식구들 맛있는 것 만들어 먹이느라  

김용택의 교단일기는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오늘은 모두 출근하여 오롯이 책만 읽어도 될 것 같아요.

 

오전 11시.

이 시간에 아무런 스트레스 받지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이런 행복이 또 어딨겠어요?

노란 표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기 시작했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작가 신경숙이란 사실 하나로 주저없이 골랐어요.

신경숙의 특유의 문체를 좋아해요.

그가 쓴 책은 거의 다 읽었구요.

거의 같은 동시대를 살았고

시골이란 환경적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그가 쓰는 단어들이 낯설지가 않구요.

 

먼저 두 손으로 책의 표지를 만져봤어요.

엠보싱이 약간 가미된 고급스런 감촉이 느껴져요.

 

제목을 봅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한밤중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일까?

불안하다.

장르가 써스펜스일까?

난 무서운건 싫은데

설마 신경숙이 그런 소설을 쓸까보냐?

 

왼쪽 오른쪽 몸의 위치를 바꿔가며

책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디오에서는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이 울려퍼집니다.

 

시위,집회,최루가스,행방불명,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등장하는걸 보면

시대적 배경이 80년대 초이지 싶네요.

인생에 있어서 질풍노도의 20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도 벅찬 20대에

불안정한 사회와도 싸워야하는 그들

정윤, 윤미루, 이명서와 단이.

미루언니와 윤교수...

저마다 어두운 기억과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니고 있어요.

엄마의 죽음과 단이와 미루의 죽음 이후

8년만에 명서에게 걸려오는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 정윤.

이렇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시작되네요

 

 대학시절 존경하던 윤교수님이 죽음을 앞 두고

제자들 손에 각자 써 주었던 말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 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 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 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윤교수는 어쩌면 죽음을 이렇게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단이, 명서와 미루가 서로에게 주었던 사랑의 방식들.

사랑의 기쁨 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견디고,

우울한 사회풍경과 시간을 뚫고 나아가면서 성장하는 정윤.

 

명서가 마지막에 준 정윤과 미루를 만나면서 기록한 갈색노트를

8년 만에 열어 보니,

“언젠가, 언젠가는 정윤과 함께 늙고 싶다” 라는 명서의 고백에

 “내가 그 쪽으로 갈게” 라는 가슴 설레는 연이의 답

그렇게 되길 바랬어요.

힘겨운 사랑이었기에 이뤄지길 바랬어요.

 

이제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지 않을까요.

약간 한 템포 느리게...한발짝 뒤로 물러나서

그윽한 커피 향처럼 지긋이 바라보며.....

부족함 없는 완전한 사랑을 하지 않을까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처럼 시위대에 참가하여 

학교에서 충장로까지 양손에 구두 한짝 씩 들고

뛰어나가던 그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네요.

어떤 철학이나 이념이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고자가 아니라

내 삶이 힘들었기에, 고달펐기에 그냥 뛰쳐나갔어요.

최루가스 마시며 눈물,콧물 흘리며

뜨거운 광주항쟁 중심에 내가 잠시 있었어요.

 

그때의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나 스스로와 어떤 약속을 했고

내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과는 또

어떤 약속들을 했을까요?

잊혀진 그때의 약속들은

지금쯤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요?

 

청춘!

한때 나의 전부이기도 했던 그리움은 

어디갔을까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이 책 표지로 인하여

"존 엣킨슨 그림쇼"라는 화가를 알았네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풍경화가로

그는 원래 철도청 서기로 일을 했는데,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20대 후반에 그림을 시작했어요.

특히 그는 밤의 풍경에 관심이 많아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밤의 그림들을 주로 그렸고

그리하여 '달빛 화가'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네요.

그의 그림 속에는 묘한 삶의 고독감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이 차가운 달빛 그림을 책표지엔 옐로우 톤으로 바꾸어

따뜻한 이미지로 재탄생 시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