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의 일상/자운영 책을 읽다

맛의 도가니탕이 아니었다.

올레리나J 2011. 1. 13. 16:20

 

 

 

 

김용택의 교단일기와 신경숙의 전화벨을 반납하고

공지영과 산티아고 순례길 수필집을 빌렸다.

도서관에서 제목을 쭈욱 스킨하는데

'도가니' 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익살스러움 때문이었을까?

눈길이 딱 멈췄다.

도가니라......

표지를 보며 역시 내가 생각하는 도가니가 맞나보다.(도가니탕)

저자를 보니 공지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 의심없이 내게 간택된거다. (박완서,신경숙,공지영,김형경.....)

 

아침에 식구들 출근시키고

점심 대용인 고구마를 굽는다.

강화도 속노란 고구마...

찌면 간단할 텐데 구워먹는게 훨씬 달고 맛있다.

 

도가니를 가져왔다.

거실에서 보아야 정상이나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내 건망증 때문에

불꽃이 보는 바로 앞에 앉아야한다.

 

며칠전 그릴에 조기를 구워놓고 깜박잊고 식탁에 올리지 못했다.

어제 조식엔 된장국 끓여놓고 국없이 밥을 먹었다.

오늘 아침 김밥 싸면서 멸쩡하게 준비한 단무지를 넣지 않았다.

 

'생선 냄새를 맡았으면 왜 생선이 식탁 위에 없는지 물어봐야할거 아니냐?'

'내가 언제 국없는 상을 차린적 있느냐?'

'김밥 먹을 때 퍽퍽했을 터인데 왜 맛없다고 말을 하지 않느냐?'

속이 상해 괜스리 식구들에게 타박을 했다.

 

소소한 일들이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된 지 한참이다.

 

구수한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책을 펼친다.

3분 정도 지나 한 번 뒤집고

평균 다섯번 정도 뒤집어줘야 타지 않게 골고루 익는다.

남자 주인공이 안개 자욱한 무진시( 광주구나?)로 내려오면서

한 아이가 기차에 치이고...

어? 이렇게 고구마 구우면서 익을 책이 아니네?

내가 생각하는 도가니탕이 아닌가 보다.

책을 덮고 고구마 굽기가 끝나자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입해갔다.

 

이 소설은 실제 TV프로그램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광주의 모 장애인 학교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에 대해 쓴 소설이었다.

 

강인호란 인물이 무진시의 청각장애인학교인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로 내려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거기서 대학선배이면서 인권운동센터 간사인 서유진과 함께

아이들의 성폭행, 폭행 사건들을 알고

세상에 알려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아이들은 자애학교 교장인 이강석, 그의 쌍둥이 동생인 행정실장 이강복, 

기숙사 생활지도교사 박보현에 의해 성폭행, 폭행 등을 당해 왔고

연두, 유리, 민수라는 아이들과 함께

강인호, 서유진, 최목사, 연두엄마 등이 모여 함께 재판장에서 싸우지만

 아이들은 재판장에서 조차 또한번 인권유린을 당하고

가해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집행유예, 징역 6개월이라는 짧은 선고를 받게 된다.

올바른 처벌을 기대했으나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비리의 고리 앞에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

차라리 난 실화가 아니었음 했다.

실화라는게 너무 가슴이 저려왔고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게 암담했다.

이 소설에도 나오는 전관예우,각종 부조리가 지금 뉴스에 회자되고 있으니

이 불편한 사실을 알면서도 나로선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유언처럼 남기고 간 이 한마디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을게다.

어째 책 한권을 반나절에 읽어냈다는 희열감은 없고

가슴 먹먹함 만이 남는다.

맛있게 구워놓은 고구마를 못 먹고

물만 마셨다는.....

 

소설의 결말은 절망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었지만

거짓과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 하나는 뿌려 놓았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다음은 인용구.

 

어둠속에서 세 개비의 성냥에 불을 붙인다.

 

첫 번째 성냥은 너의 얼굴을 보려고

 

두 번째 성냥은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성냥은 너의 입을 보려고

 

그리고 오는 송두리째 어둠을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

 

- 자끄 프레베르 <밤의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