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의 일상/자운영 책을 읽다

편집된 죽음

올레리나J 2010. 9. 28. 17:52




추석 연휴를 책과 함께 보냈습니다.
집근처 공원에 가서 따스한 햇살을 등에 지고
책읽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유로움과,
가을을 가득담은 선선한 바람과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환한 빛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나중에는 글씨가 흐릿해집니다
거기서 멈춰야하는데 너무나 책속에 빠지다보니
무리를 했는지 머리가 아팠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중 가장 슬픈 일은 노안입니다.
삶의 질과 연관되기 때문이지요.
책을 가까이 하는게 무서워집니다.
이러다 눈이 멀어질까 두렵습니다.

책 표지가 맘에 듭니다.
은은한 고서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움,
오래된 책에서 전해지는 케케한 냄새,
표지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6시간 정도 긴 호흡으로 한꺼번에 읽어버린 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성공한 출판업자 에드워드.
그는 오랜 친구 니콜라가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하는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친구를 지켜보는 그의 시선을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니콜라가 쓴 형편없는 초고를 매끄러운 문장으로 번역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도와준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니콜라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에드워드가 던져준 문학적 모티프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그의 뒤에는 항상 애증의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에드워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니콜라에게 신작 원고를 받은 에드워드는
니콜라가 30년 전 이집트에서 죽은
그의 첫사랑 야스미나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이 니콜라의 진정한 첫 걸작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에드워드는 니콜라를 향한 치밀한 복수극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그의 진정한 걸작을 표절로 만드는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에드워드는 니콜라를 쓰러뜨릴 도구인 "책"의 제작에 착수합니다.
이 과정은, 극히 기묘한 살해 방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권의 책이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으로서도 실로 흥미롭습니다.
극히 치밀하고 복잡한 과정에 비해서는
계획이 너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감도 있지만,
의도한대로 맞아떨어져 갈 때의 쾌감은 상쾌하기 까지 합니다.
에드워드의 계획에 운이 따라주는 것도
애초에 철저한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이야기의 서두에서는,
마치 축제와도 같은 떠들썩한 공쿠르상 수상식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중심에 니콜라가 있습니다.
그런 그가 행복의 절정에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질투와 증오 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충분히 범행동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에드워드의 동기가 과연 살인까지 계획하게 될만한 것이였나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니콜라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에드워드의 심리 묘사가 돋보입니다.
오싹할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때로는 위트와 아이러니가 넘치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가 펼쳐집니다.
이 작품은 1994년 우리나라에서 <표절>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 바 있다는데
한마디로 짧지만 강력한 아우라를 느낀 작품이었죠.

범죄자가 행복해진다는 어쩌면 비도덕적인 결말이지만
난 이런 결말도 좋습니다. 뻔한 권선징악이 아니라서 좋고
인생에 있어 꼭 착한 사람이 이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얻은 메세지는
'오직 상처받은 자만이 완전범죄를 이루어낼 수 있다.' 네요
상처를 받은자와 상처를 준 자
복수를 하는 자와 복수를 당하는 자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둘 다 모두 동정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난 복수하는 쪽에 감정이 더 많이 쏠립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크프리트여!자,여기 성배가 있다! 사면이여!기쁨이여!'
함축적인 여운을 남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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