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프라하의 연인,카프카를 만나다

올레리나J 2010. 9. 4. 08:34

8월 4일 수요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어느 덧 여행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음을 느끼며
그 허전함에 눈을 떴다
천재들을 유난히 많이 낳은 도시 프라하.
음악가 스메타나, 드보르작, 소설가 밀란 쿤테라 그리고 카프카.
'프라하는 카프카 이고 카프카는 프라하 '라고 할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한다.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프란츠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유태계 체코인으로 태어났다.
이 곳에서 나는 그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책 표지까지 맘에 든 (빨강색)
'카프카의 프라하'를 들고 왔다
한 때 그의 책들을 읽고 내 존재와 불안한 미래로부터 위안을 삼은 적이 있었다.
세상을 뜨기 직전의 요양소 체류와
몇 번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프라하에서 보냈다.
프라하가 '맹수의 발톱'처럼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프라하를 증오하면서도 끝내 떠나지 못한 것이다.
카프카의 삶과 문학은 카프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던
프라하와 깊이 얽혀 있으며,
프라하에서의 사회적, 개인적인 체험들은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도시 프라하가 작가 카프카의 문학성을 어떻게 키워 왔는지를 살핀다.
카프카가 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프라하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니 믿겨지지 않지만
나도 한 때는 내고향 진도가 지긋지긋하여 벗어나려고 몸부림 친 경험이 있으니
그를 충분히 이해한다.
카프카는 열광적인 산책가였으며 도시의 인디언이었다.
이 책은 그의 산책로와 그의 일생은 물론
그가 즐겨찾던 곳들을 지도와 그 당시의 고색창연한 건물 컷으로 인해 쉽게 읽힌다.
프라하를 증오하면서도 끝내 떠나지 못했고
폐결핵으로 41세의 짧은 생을 프라하에서 마친 카프카
그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
그의 동선대로 산책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이뤄질 베낭 여행을 꿈꾸며. ..



호텔 8층에서 아침 먹으러 내려오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담은 주변 풍경



어젯밤 묶은 호텔은 지금까지 호텔 중에 가장 력셔리했다.
인솔자에 따르면 호텔의 실수로 특a급에서 묶게 되었단다.


4성급이었지만 5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매우 크고 화려했다



로비도 넓고, 백화점 쇼핑몰처럼 여러 상품들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상쾌하여 기분까지 업!



명성있는 호텔답게 먹거리도 화려하다. 각종 과일들로 눈부터 행복한 아침...



호텔 주변을 산책한다
꿈에 그리던 프라하의 하루는 이렇게 환하게 시작된다.



프라하 성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어제 야경으로 보았던 눈에 익은 건물들이 스쳐지난다
나란히 서 있던 쌍둥이 틴 성모 교회의 날카로운 고딕식 첨탑이 보인다.


세계의 많은 기업들 중 삼성이
프라하에 광고비를 가장 많이 쏟아붓고 있단다.
가이드 말로는 삼성전화기는 목에 걸고 다니고
노키아나 유럽전화는 주머니에 넣고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산 광고 마케팅이
이곳 체코에서 대단하단다.
삼성 거리가 있고 현대의 거리도 눈에 뛴다.



까를교 구시가지 쪽






돔 위의 여인상



드디어 프라하 성에 도착



햇빛 찬란한 역광이라 사진 찍기가 힘들었지...



비타성당(Katedrala sv. Vita)혹은 비스타 성당이라고도 한다.



926년 바츨라프에 의해 원형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비타 성당은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14세기 까를 4세 시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개축이 진행되면서 1929년 완성 되었다.



전체길이 124 미터, 너비 60 미터, 천장 높이 33 미터,
남쪽탑 96.5 미터, 서쪽 2기의 탑은 82미터.
화려한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당에 보관된
보헤미아왕의 왕관은 비타 성당의 지위를 이야기 해준다.
성당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



총 21개의 예배당으로 이루어진 성 비트 성당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프라하 성을 중건한 비츨라프 4세 때 바람난 왕비가 고해성사를 했다.
평소 의심이 많던 비츨라프 4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 내용을 물었으나
신부는 끝까지 자신의 소임대로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지 않자


이에 화가 난 왕은 신부의 혀를 뽑은 뒤 발에 돌을 매달아 블타바강에 던져 버린다.
이 신부가 훗날 성인의 반열에 오른 네포무츠키 신부다.




나중에 누군가가 신부님의 시체를 수습해 이 성당에 모셨는데
성당 안에 관과 동상이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 슬픈 사연을 표현해 놓았다.







성당의 서쪽입구 청동문에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묘사되어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어서인지 건물은 중세의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점차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만지면서 소원을 말하면 이뤄진다하여
얼마나 많은 손이 지나갔는지 번들거린다



프라하는 소원을 이뤄주는 곳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내 소원도 모두 이뤄지길....







비타성당의 고딕식 뾰쪽 첨탑



거인상들 사이, 정문의 윗부분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그릴 장식의 제일 윗부분에는 왕관이 얹혀있고
그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T, M, J 의 세 글자가 세로로 겹쳐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황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e Teresie와 그녀의 장남이자 역시 제국의 황제였던
요젭 2세Josef II의 이니셜로 이들의 통치 시대에 정문이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여
그 첫 글자들을 넣은 것이다.
가운데 입구 양쪽 기둥에는 체코 국기가 걸려 있고
오른쪽 건물 위에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있다.
대통령이 현재 국내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프라하 성의 정문 위에는 두 개의 커다란 조각상이 있고
그 아래 정문 입구 양쪽에는 두 명의 근위병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몽둥이와 칼로 발 아래 깔린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 이 두 명의 거인상은
1770년 제작된 것으로 원래는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졌던 오리지널 작품을 재현시킨 것이다.



이 거인들이 이토록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 아래 있다는 체코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이고
아래에 깔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는 피지배민족인 슬라브족을 상징한다.
어느 나라나 피지배민족의 삶은 신산하겠지...



아마데우스 촬영 장소인 대주교의 궁전



이렇게 멋진 근위병이 보초를 선다.
후문보다 정문의 근위병이 키도 크고 잘 생겼다고... ㅎㅎ.
말을 건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근위병과
악착같이 나를 쳐다보게 만들어서 사진을 찍어보려는 나.
졌다>>>>>


대통령 궁 근처라서인지 이런 귀여운 탐지견이 수시로 보인다



체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프라하 성은 9세기 보르지보이왕 시대부터
건설을 시작해 14세기 까를 4세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6세기 합스부르그의 루돌프 2세가
이 곳에 궁정을 두었을 때 가장 번성한 시대를 보냈다.
이후 마티아스 황제가 다시 비엔나로 궁정을 옮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정문에는 2명의 근위병이 근무하고 있으며
매일 정오에 열리는 화려한 위병식은 흥미로운 볼거리.
총길이 570미터, 폭 120미터의 프라하의 성은
프라하 야경 사진의 가장 많은 배경이 된다.



우리 나라 청와대는 외딴 곳에 있는 섬처럼 느껴지는데 프라하나 유럽은
대통령 관저가 국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더불어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공간적인 소통이 이뤄지지 않으니,인간적인 소통인들 제대로 될까나...



프라하성은 도도히 흐르는 블타바강을 굽어보고 있다.
카프카의 대표작 '城'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922년 1월부터 9월까지 프란츠 카프카가
폐결핵의 고통 속에서 집필한 「성」은 미완성인 채로 끝난다.
카프카가 친구에게 전해준 바에 의하면,
이 작품은 계속 성에 들어가려 하던 K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성으로부터 조건부 체재를 허락한다는 통지서가 도착하나
결국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성」은 완전한 것,
최고의 존재에 다가가려는 카프카의 동경(憧憬)이었을지도...
아니면 카프카가 프라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표현했을지도....



프라하 성이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기에 프라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카프카도 이 자리에 서서 그의 작품 城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역광이라 멀리까지 보이지 않아서 가는 실눈을 뜨고 봐야했다



우리 일행들이 성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프라하는 카프카에게 단순히 푸근한 고향 이상의 의미였다.
“프라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어미는 맹수의 발톱을 가지고 있다”라고 카프카는 말했다.
왜 그는 맹수의 발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용기가 없었을까? 아님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꿈같은 자유시간에...카프카를 읽는다
이국적인 이미지의 대명사처럼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친숙한 이름의 작가 카프카
이미 오래전에 죽은 작가지만, 프라하에서 만큼은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길모퉁이에서 문득 맞닥뜨릴 것 같은 느낌.
코가 예리한 남자를 만나면 혹시 카프카?
엉뚱하다.생뚱하다



안개 자욱한 프라하를 보며 우울해 했을 카프카는 없다.
지금은 낭만의 도시 프라하답게 거리의 악사들이 추억을 더 깊게 만들어 준다.
음악이 흥겨워 김교감 샘과 춤을 추었다 .
하피 이때 남편은 담배피러 가고 비디오 담당 교장샘도 우릴 놓쳤다
거리의 악사나 화가들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이들은 당당하게 프라하 시에서 오디션을 통과하고 허가 받은 예술가들이기에
이들은 실력뿐 아니라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끄는 표정과 몸짓도 프로였다



대통령 궁을 나서려는데..



자꾸 뒤돌아 보는 나. 젊은 카프카가 자꾸 부르는 것 같다.....



비타 성당 측면



근위병 교대식을 알리는 광고인가 보다.



구시가지 쪽으로 건너가려고 트램을 타려 한다.



원래 까를교를 걸어서 갈 예정이었는데 인솔자가 피곤했는지
현지 가이드와 속닥거리더니 일인당 2유로씩 내라 한다
색다른 경험이라 불평은 하지 않았으나 난 걸어서 가고 싶었다.



카를 교의 Bridge Tower.
1648년 스웨덴 군대의 프라하 성 공격에 교탑에서 체코는 방어에 성공하였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블타바강 너머로 보이는 프라하 성과 비타 성당의 첨탑



뷰포인트에서 한 컷!



위엄을 자랑하는 Bridge Tower 앞에서...



프라하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뷰포인트...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



잊지않기 위해서 쉼없이 셔터를 눌러대었던 곳...



뷰포인트에서 바라본 카를교.
1357년 까를 4세때부터 건설을 시작해 1402년 완성된
길이 516 미터, 넓이 9.5 미터로
블타바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오래된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이다.



2005년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기억한다.
그 당시 드라마 보면서 저런 멋진 곳도 세상에 있구나? 난 언제 가보나...
그랬었는데...그랬었는데...꿈은 이루어지누나.



보행자 전용도로인 까를교는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웠던 사자다리보다 훨씬 더 감동이 깊다.
우선 더 고풍스럽고,여러 예술 작품들이 많아 눈길을 잡아 끈다.
하루 종일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 구경만 해도 하루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까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강 오른쪽



은은한 흑백사진도 부드러워서 좋다...



많은 인물 중 단연 눈에 띄는 안젤리나 졸리의 남편,품절남인 브래트 피트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멋진남을 이렇게 그려도 되는건가?



까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강 왼쪽



30기의 조각상 중 눈에 띄는 예수 수난 십자가 상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 당하시는 모습
반원을 그리며 십자가 양쪽에 달린 글씨는
히브리 말로 "거룩,거룩,거룩한 주여"



다리 양쪽 난간에는 각각 15 개씩 총 30 개의 체코 일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17 세기 후반 ~20 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250 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250년 이라...우리 나라 건축물도 이처럼 대대손손 대물림하며 지어진 것이 있을까나?
성질 급한 우리 민족, 뚝딱 뚜다닥~~~완성!!!



하염없이 이러고 서 있고 싶었다
카프카도 산책 중에 이 자리에서 이 폼으로
무심히 흐르는 블타바강을 바라보며 작품 구상을 했을거야...
그리고 후다닥 집으로 달려가서 달필로 원고를 써내려 갔겠지 ...



따가운 햇빛도 나를 막을 순 없다.
온 몸으로, 온 맘으로 프라하의 낭만속에 풍덩 빠져본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다는게.....그저 부럽다.
에술적 재능은 타고나는게 99% 노력은1%라고 생각한다
그런 재능을 왜 내겐 주지 않았을까?



화려한 문양의 그릴 장식 가운데는 누가 누워 계시는지 ....



방금 왔던 브릿지 타워쪽으로 해가 넘어가나 보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감동은 깊어진다.


카를교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 성 네포무크 상(1683년작)
부조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이 닿아 금빛으로 윤이 난다.
그걸 만지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오른쪽 여인의 등을 먼저 만지고 왼쪽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어본다..



내가 검정색 의상을 선택했다면 빨강 표지의 '카프카의 프라하'가 돋보였을텐데
의상에 가려 빛을 못본다. 아니 어쩜 그 반대일지도 몰라...



다리 끝까지 와서 프라하 성을 근거리에서 본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간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새벽부터 밤까지 그 인파는 끊이질 않는다.



Bridge Tower 의 전망대에 올라
블타바(몰다우,도나우,다뉴브)강이 흐르는 쪽으로 쭈욱 내려다 보고 싶다.
유로는 주머니에 있는데 시간이 없구나.
또 한 번 페키지 여행의 서글픔을 느낀다....



어젯밤에 보았던 까를 4세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반겨주는구나.



누구 아는 사람 없을까? 걸음을 재촉하며 셔터 누르기...



무거워서 내던지고 싶은 카메라...



맨홀 뚜껑은 왜 담겨 왔을까?
까를교와 프라하성이 ㅣ새겨져서 일게다.



프라하엔 고색창연한 건물만 있는게 아니다.
오래된 자동차도 유럽 사람들은 귀히 여긴다.
중세풍의 프라하 도심지에 클래식 카....잘 어울린다.



프란츠 카프카 광장을 지나가다 커다란 조형물을 보게 된다



총 85,741개의 열쇠로 만든 이 작품은 체코 아티스트 질 데이비드 작으로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적 민주혁명인 벨벳혁명 이후의 시간들을
열쇠를 이용하여 상징하였다고 한다



혁명이란 글자를 이토록 많은 열쇠를 이용해서 세우다니
역시 예술가들의 비상한 감각에 찬사를 보내나니..
자세히 보면 윗글씨부터 REVOLUCE(혁명)



R 자 부분의 열쇠들....
벨벳 혁명(체코어: sametová revoluce) 은
1989년 11월 16일 ~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이다.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에 폭동 진압 경찰이
프라하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학생 시위를 억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1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대중 시위가 이어지게 된다.
11월 20일에 프라하에 운집한 평화 시위자의 수는
전날 200,000여 명에서 50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2시간의 총파업을 결행하였다.
다른 나라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거리 시위가 늘어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1월 28일에 당이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2월 초에 오스트리아,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에서 철조망과 여타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1948년 이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음으로 非공산당 정부를 지명하고 사임하였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989년 12월 28일에 연방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다음날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직에 올랐다.
1990년 6월에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치렀다.
"벨벳 혁명"이란 말은 국제 사회에서 이 혁명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체코 내부에서도 이 표현을 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되면서,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처음부터 쓰던 표현인
"신사 혁명"이란 말을 쓴다.
체코 공화국에서는 계속 이 사건을 "벨벳 혁명"으로 칭한다.
한마디로 무혈혁명이네.


알록달록 색칠도 되어있고....



구시가지에 다시 왔다.. 고딕, 르네상스,바로크 등
각종 건축 양식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11~12세기 무렵의 상업교역의 중심으로 번영한 지역으로
지금은 광장 주변에 레스토랑과 상가들이 즐비하다.
프라하를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이 이 곳에 모이는 까닭은
천문시계,얀후스의 동상,틴교회 등 프라하의 명소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문시계의 쇼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천문 시계탑 낮 동안(오전 9시~오후9시) 매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마다 12사도와 다른 조각들이 움직인다.
가운데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을 표현하는 천문시계의 양 옆으로
4개의 인형이 서 있다.



정시에 우선 시계 오른쪽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오른손에 감긴 줄을 잡아당긴 다음
왼손으로 모래 시계를 뒤집는다.
오른쪽 악기 들고 서있는 동상은 세상의 유혹을 상징.



그리고 그 옆의 탐욕을 상징 터키인은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천문판 윗 부분, 천사상 양 옆의 창문이 열리고
12사도(11명의 사도들과 성 바울)가 성베드로를 선두로
천천히 움직이고 행렬이 끝나면 가장 윗 부분의 황금 닭이 나와
종이 울리면서 시각을 알린다.
타종의 회수는 24시간제를 따라서, 오후 3시에는 15번 울림
너무도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지던 퍼포먼스였다.
짧음이 아쉬웠는지 꼭대기에서 트렘펫 소리가 울린다
아무튼 이 시계를 만든 후 프라하 市는
이 아름다운 시계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것을 만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안 온드류브(Jan ondrejuv)' 교수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소문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아름다운 시계를 더 강조하기 만들어낸
프라하시와 시민들의 마케팅의 일환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계 아래쪽으로는 중세 가장 존경받던 이들인
수학자.수호천사,천문학자,철학자가 양쪽으로 둘씩 나뉘어 서있고
가운데 원 안에는 보헤미아 농부들이 농사짓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70 미터 탑에서 광장을 내려다 보는 사람들...아찔하겠다.



아무튼 60년 전도 아닌 600년 전에 이 시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지금까지 그 시계가 작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선 그들 장인들의 솜씨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짧은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많은 여행객들은 구시청앞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참고로 이곳은 커피나 음료수 등은 주문할 수가 없고
오직 음식과 같은 값이 비싼 것들만 판매하고 있다고 하니
솔직히 합리적인 유럽인들 답지 않은 치사한 상술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수학여행을 왔는지 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찍는다.



아름다운 야경으로 처음 보았던 틴 성당 앞에 다시 섰다
쌍둥이 탑으로 아담과 이브를 상징한다고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교회다.
1365년에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광장 뒤쪽에 작은 탑들을 거느린 80m의 쌍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2기의 첨탑 사이에는 황금 성배를 녹여서 만든 마리아 상이 있다.
정식 명칭은 '틴(세관)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
가운데는 성배를 녹여서 만든 마리아상이 있다.



이곳 구시가지 틴광장은 400년 전 신교와 구교와의
종교전쟁 물결이 몰아쳤던 곳으로
종교개혁사의 중요한 의미가 담긴 곳이다
분홍색 파스텔 빛의 아름다운 건물은 틴 성당 옆에 있는 골스 킨스키 궁전



이 동상의 주인공은 얀 후스.
그는 당대 최고의 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일의 마틴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 시대에 부패했던 종교의 일면인 면죄부 판매,
카톨릭 교회의 부정한 관례,
사치스러운 형식에 반발하여 개혁주의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2년 간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설교를 하였으며 풍성한 집필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때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회에 관해서"라는 책이며 또한 그는 그가 써낸 저서와 설교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지만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짙은 녹색으로 녹이슨 동상은
아름다운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음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얀후스 동상의 배경이 되어 더욱 아름다운 골스 킨스키 궁전



얀후스의 기념비는 얀후스가 순교자로 이 땅의 삶을 마감한지 500년 후인
1915년에 조각가 라드슬라브 샬룬에 의해 제작되어
이렇게 구시가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서서 많은 체코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얀후스의 동상 밑부분에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지켜라"란 글귀가 쓰여있다



이 아름다운 분홍색 파스텔 빛의 아름다운 건물은 틴 성당 옆에 있는
골스 킨스키 궁전이다.
이 궁전은 골스 백작의 저택으로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때는 엘리트 중등 학교였고
카프카가 이 학교 출신.
1층에는 프란츠 카프카라는 이름의 서점이 있다.
현재 국립 미술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궁전에 주목할 것은 바로 건축양식
전 세계적으로도 얼마 볼수 없는 로코코 양식이기에 특별하다고



얀 후스 동상 주변...
'프라하의 연인'에서 소원을 적은 쪽지를 붙여 놓은 벽이
바로 저 청동상 둘레였는데 사실은 그건 설정이었단다.
신혼여행객 중에는 둘만의 소원을 적은 쪽지를 들고와서
그 곳으로 데려다 달라기도 한단다.
그 드라마 찍을 때 체코시민들도 큰 관심거리였다나?



건물 외벽이 예쁜 분홍색과 흰색의 벽토로 장식되어
보고 또 봐도 매력만점인 골스 킨스키 궁전...지금은 국립미술관



프란츠 카프카 하우스
1883년 7월 3일 카프카가 태어난 집은
현재 대문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1960년대 중반 ‘프라하의 봄’에 제막된 반신상을 건물에 붙여
카프카의 생가임을 기리고 있다.
이 도시가 그의 영혼에 각인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는 자신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가정교사에게
창문 밖의 프라하 전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곳이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지요.
건너편 건물은 대학이고,
왼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제 사무실입니다.”
손가락으로 몇 개의 작은 원을 그리며,
카프카는 이어서 말했다.
“제 인생은 이 작은 원 속에 갇혀 있어요….”
둥글게 둥글게 퍼져나가지만 또한 단단하게 막혀 있는 원.
그 안에서 카프카는 자라나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또 글을 쓰면서 살다가
결국 죽어서는 프라하의 관광자원이 됐다



1735년에 완성된 성 미쿨라세 교회
원래 베네딕트 수도원이었으나 지금은 체코 후스교회의 소속임.
아름다운 천정화는 성 니콜라스와 성 베네딕트의 삶을 그림.
하절기에는 음악회의 장소로 사용됨



'자본주의'라는 목없는 거인 위에 무등탄 채 방향을 가르키는 카프카
이 도시에서 카프카는 소설 '변신'을 쓰면서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의 변신을 갈망했으나
세번의 약혼과 세번의 파혼을 겪으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이 구시가지 유대인 거주지에서 태어나
프랑스 초현실주 시인 부르통이 '유럽의 마술적 首都'라고 탄복했던 프라하에서
끝없이 떠나기를 갈망하는 역마살을 잠재우고
프라하를 증오하면서도 끝내 떠나지 못하고
41세 되기 한달 전에 프라하에 몸을 묻었던 카프카



발 아래는 카프카의 대표작품 '변신'을 형상화한 벌레가 새겨져 있다.
프라하 가기 전 내가 다시 한 번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 대충 줄거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레고르 잠자는
늘상 그랬듯이 일을 마치고 별다른 일 없이 하루를 맞이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꿈자리 사나운 악몽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무시무시한 외형을 지닌― 뭔가,
'벌레같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를 처음에는
때가 되면 밥을 먹으라고 말을 해 주며 음식을 만들어주는 등의
최소한의 가족으로 인정해 주었으나.
그러나, 그것도 잠시.
꽤나 시간이 흐르자, 가족들은 자각했다.
그레고르 잠자의 그런 '벌레같은 것'의 모습이 한때의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그 후부터 다른 이웃 사람들에게 그레고르 잠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렸고,
그레고르 잠자는 집 안에 없는 것이다
언젠가, 손님들이 왔을 때 그레고르 잠자가 오랜만에 방에서 기어나오자
가족들은 그를, 아니 '그것'의 존재를 망신스러워했다.
가족들은 점차로 잠자가 없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레고르 잠자는 결국 멸시 속에 삶을 마감했다.
스스로 먹는 것을 줄여나가 굶어죽은 것이다.
그것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남은 가족들은 너무나 행복해한다.







영화를 찍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선남선녀는....
저 남자의 미소 ! 보고만 있어도 설레이는 맘...감출 수가 없네











점심 먹으러 가는 길







금강산도 식후경! 딱 맞는 말이다. 배가 무지 고팠다.짜디짠 스프는 먹지 않고 패스!



체코 현지식으로 오늘 점심 메뉴는 맥주와 바닥 스프에
빵 3조각+돼지고기 한조각+ 치즈토핑이 잠수한 아주 부드럽고 감칠맛나는 행복한 점심!



맥주하면 독일을 떠올리지만 동유럽의 맥주강국 체코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은 연간 1인당 맥주 소비량이 단연 최고이나.
1인당 맥주 소비량으로 맥주강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체코는 필스너 우르켈, 부드바이저와 같은 세계적인 상표인 맥주를 생산한다.
맥주 애호가들이라면 그 맛을 인정하는 버드와이저(Budweiser).
지금은 미국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고 있지만,
사실 이 맥주의 원산지는 보헤미아의 왕국, 체코의 부디요비체라는 곳.
아무리 독일이 맥주로서 유명하다고 하지만,
맥주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그 맛으로서 체코를 제일로 여긴다고 한다.
이 부드바이저는 우리나라의 막걸리와 비교되는데,
걸죽하고 냄새가 독하면서 발효가 잘 된 냄새를 내기 때문이다.
원래 버드와이저는 부드바이저라고 불렸는데,
이 상표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버드와이저라고 읽혔다.
그런데 최근에 이 상표에 10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저작권에 관한 판결에서
체코의 '부드바이저 부도바르'라는 회사에서
미국의 맥주회사에 버드와이저 상표 판매를 허락하는 대신
앞으로 10년 동안 체코산 맥주원료를 매년 10만톤씩 판매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맥주 맛을 모르는 난 그냥 시원한 맛에 한,두모금



야경으로 보았던 화약탑이 시커먼 곰처럼 나타난다
화약 탑 (구 시가지 통하는 13개 출입문 중의 1개).
1469년 건립하여 대포의 요새로 사용.
17세기에는 화약 저장 건물이 되었으며,
1649년 스웨덴 군이 프라하로 침입 했을 때
화약이 폭발하여 엄청난 손상을 스웨덴 군에게 입혔다.
1757년 프러시아 점령 당시 건물 조각 장식이 손상되었지만,
조각 장식 등을 1876년에 복구하였다.



유럽의 심장, 북쪽의 로마, 백탑의 도시,건축 박물관 등은
모두 프라하를 가르키는 말이다
세계대전으로 폭격을 받지 않아 온전히 보존된 것이 많아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각종 건축 양식의 총 집합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유럽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의 하나이며, 보헤미안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창에 비친 파란 하늘과 흰구름..어쩜 이리도 시원하냐



시계탑 주변







모짜르트 돈 지오반니 포스터 ...아래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다는 것.



프라하 오페라하우스...프라하는 음악의 도시이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라는
두 걸출한 음악사의 거장을 배출한 국가답게 매년 오월이면 <프라하 의 봄 음악축제>가 열리고
매년 새로운 음악예술의 정상급 악단과 연주가들이 펼치는
다양한 콘서트와 오페라를 기호에 따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음악축제는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시작되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은 시민회관으로 1883년 프라하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운 극장
1층에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의 오프닝과 클로징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이 있다.
모짜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와 클라리넷 협주곡 K.622등이 초연된 의미있는 곳


모차르트와 체코는 아주 인연이 깊다.
물론 그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출생지 잘츠부르크에도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의 음악적 자질을 알아보고
오페라 ‘돈 조반니’를 최초로 무대 위에 올린 것이 1787년 바로 체코의 프라하 극장이었다.
이처럼 수준 높은 예술감각을 지녀 ‘유럽의 음악학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음악에 더해 체코의 예술적인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형극이다.
만약 ‘인형극은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생각은 체코에서 여지없이 깨지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코의 인형극은 수백 년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어
극 자체의 예술성은 물론 인형을 만드는 솜씨 또한 세계최고 수준이다.
프라하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인형극 공연을 알리는데
설사 영어나 체코어를 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어의 장벽이나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장르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데 난 언제 다시 볼꼬?.



마이클 잭슨 공연 포스터



한국인이 운영하는 면세점을 찾아서 프라하 뒷골목을 한참 데려가더니




크리스탈 생활용품과 각종 고가의 쥬얼리를 사도록 권유한다


그냥 나오기가 눈치보여 사진 한 번 찍으면서 관심가져 주시고...



한국 페키지 여행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그들....



예쁘긴 한데 너무 비싸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더만...



밖으로 나와 그늘에 앉아 페키지 여행의 씁쓸함을 곱씹고 있었다
시장 근처였다면 구경이라도 할텐데 뒷골목 조용한 곳이라 구경거리도 없고
하루종일 고생한 발 편하게 해주었다.



 

 

 

 Symphony No.9 OP95   'From the New World' 4악장

드보르작은 체코 출생의 보헤미안 국민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슬라브족 춤곡 형식을 도입하여 보헤미아의

정서가 넘치는 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신세계 교향곡>,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유모레스크>,

<집시의 노래>, 첼로 협주곡 나단조 등이 있다. 드로브작은 51세때 뉴욕 국민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당시(1892년경) 뉴욕 국민음악원]에서 보내온 초청장이야말로 (나중에 드보르작에게 엄청난 고독과 향수병을

안겨주는 초청장이 되고 말았지만) '향수'라고 하는 인간 내면의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감정의 본질을 파헤친

[신세계 교향곡]등 세기적인 명곡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