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폴란드

올레리나J 2010. 8. 12. 16:37

7월 28일, 새벽부터 가는 비가 내림
오늘도 새벽 4시에 눈을 떠 뒤척이다 5시부터 꽃단장을 했다.



독일에 비해 가난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폴란드의호텔은 후지고
조식도 '콘티넨탈 블랙퍼스트' 라고 뷔페가 아닌
빵과 토마토 스프,감자,치킨가스,물만 제공되었다.



식후 시간이 남아 호텔주변 산책을 했다.비가 금방 그칠 것도 같다



빨간게 꽃인 줄 알았는데 예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네도 타 보고



오늘 날씨가 어떨지 하늘을 쳐다보니 먹구름은 끼지 않아 금방 그칠것 같았다.



아파트도 보이고



호텔 뒤쪽으로 멋스런 주택들도 보인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를 배출한 나라답게 한집 걸러 두번째가 온통 성당건물이다



일생에 3번 교회에 간다는(탄생,결혼,죽음) 다른 나라 국민들과는 다르게
줄을 서서 미사가 이뤄질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하다고



8시 40분에 대량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로 출발



세 모자는 아침 일찍 부터 어딜 가는 걸까?



기아 간판이 반갑다




이 날 달리는 버스안에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수를 은퇴하고 철도, 토목 엔지리어링 기술 자격증으로 아직도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는 75세 할아버지 부부



뇌졸증으로 다리가 불편한 사모님의 진갑기념으로 오셨다는 7년전 퇴임한 수원 공무원 출신 할아버지



남루한 벼룩시장...독일에서 보지 못한 풍경...



남편은 은퇴 아내는 현직 교사인 서울 잠심에서 온 부부



청주시 중등학교에 근무 2명, 명퇴 2명 자칭 '산소같은 여자들의 모임' 나이 55세의 여자샘들 4명



연수구 경찰청장으로 7월초 퇴직한 경찰 공무원 출신 부부



대전조폐공사에 근무하고 있는 56년생 남편과 아내, 아들,딸 가족 4식구



친구 사이인 청주 초등학교 현직교사 여자샘 2명, 그리고 우리 삼총사..이렇게 24명의 단촐한 팀 구성원



휴게소에서 주유도 하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함께한 베스트 드라이버와 한 컷



좁은 빗길에서 사고가 났다고 경찰차가 앞을 가로막아 빙 ~ 돌아서 갔다.



아우슈비츠 근처에 왔는데도 비가 그칠 줄 몰랐다



4시간여를 달려 1시쯤 폴란드 현지식당에 도착했다.
여기서 삐쩍 마른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닭고기 가스에 삼총사 총무가 가져온 멸치볶음을 곁들어 먹었다.


폴란드에 왔으니 간단한 폴란드 인사 정도는 익혀두는 것이 좋다.
아침인사 "진도부리" . 고맙습니다 "진꾸에"



독일말로 아우슈비츠, 이곳 폴란드말로 오슈비앵침인 이 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들을 가두었던 수용소 건물 지대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유명한 이 곳.
그 인류최대 잔혹사의 현장이었던 오쉬비엥침
가늘던 빗방울도 굵어졌고 날씨는 을씨년스럽게 무척 추웠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헤드셋을 렌탈하기 위해 들어간 건물에는 전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인들도 관광순위 5위일 정도로 많이 찾아 온다고 한다.
특히 독일 학생들은 봉사활동을 하러 의무적으로 이곳을 방문케 한다고



우리가 둘러본 제 1수용소 지대로 들어가는 철문 위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글귀가 달려있다.



독일 패망후 박물관으로 바꿔져서 전쟁의 잔혹함을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실내에 들어가서는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기에 건물 외형만 찍는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산더미같이 쌓인 안경들만 모아놓은 안경방,
유태인들이 쓰던 고급스런 법랑 등의 가정용품방,
일정한 규격으로 정해진 고급 가죽 가방을 모아 놓은 방,
요즘 신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신발이 가득한 방,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카페트 등 고급직물을 만들었다는 머릿카락을 모아놓은 방.
끔찍하여 또렷히 기억하기 싫어지는 유품들을 본다.
점심 먹은게 올라오려하고 예민한 내 위장은 뒤틀리는 아픔에 고통을 참기 힘들다



그리고 나치들이 찍어 남긴 기록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곳에 수용된 날짜와 사망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특히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뇌리에 박혔다



그럼 독일은 왜 그토록 유대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당시 독일은 1차 대전 이후 전쟁에서 진 여파로 경제공항에 이른 상태였었다.
이 힘든 시기에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4%가
독일 경제의 1/4을 주무르면서 주요 요직을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자
이들의 재산을 몰수키로 하고 14세기 유럽인 약 3,000만 명이 죽은
흑사병의 원인이 유대인들이 우물에 약을 풀었기 때문이라는 낭설로 반유대인 감정을 고조 시킨다.



그러면서 독일인들에게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부추기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점점 히틀러 독일의 사상에 유럽이 뒤숭숭해지자 불안감을 느낀 유대인들이
유한 정책으로 유대인에게 관용적이었던
폴란드로 모여 들면서 약 300만 명이 거주하게 된다.



독일은 폴란드에서 제일 먼저 아우슈비츠를 점령하였다.
왜냐 하면 이 곳이 중화학 공업지역으로 이 곳의 폴란드 야전사령부를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곳은 지역 특성상 외부로 탈출이 어렵고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이 들킬 염려가 없으며
역청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열탄으로 쉽게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전 유럽 국가들이 이 곳에서 2,200km 내 사정권으로 들어 오며 철도 이송이 아주 용이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을 위해 광분하였던 나치스 친위대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고
그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한다.
그 뒤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 시설로 확대되어
인근에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져 1945년 1월까지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에 달하는 4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다.



이곳으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SS(나치 친위대) 군의관의 수신호에 따라 엄지를 들면 강제 노동
검지를 아래로 향하면 가스실로 보내 졌다.
가스실은 주로 등일을 할 수 없는 어린이, 여자, 노인, 불구자였다 .


가스실을 간신히 벗어난 사람들도 하루에 12시간 이상 노동에
헐벗은 채 시달려 약 평균 2 개월 이상을 더 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러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을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유대인과 정치범이 학대와 굶주림 속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끔찍하게 고통 받으며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이렇게 자유롭게 넘나드는 곳이건만...



고전압을 흘려 탈출을 막던 전기 철조망.
지옥같은 수용생활을 견디다 못해 이 철조망에 몸을 던진 유대인들도 허다하다.



가스로 죽이고 소각하던 건물에 들어가 본다.

가스실로 보내지는 사람에게는 모두 옷을 발가벗겨
샤워를 시켜 준다면서 비누를 손에 들려 가스실로 보내 졌다.
어둡고 좁은 가스실에 단체 샤워 명분으로 한 방에 350 명을 집어 넣고
천정 큰 구멍을 통하여 해충 박멸제인 사이클론B를 살포하면
약 15분~20분간 고통에 몸부림치던 유대인들이 죽게 되는데
아직도 시멘트 벽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갔을 그들이
손톱으로 깊게 파헤친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체를 화장하는데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역청탄을 이용했으며
사람이 다 타고 나오는 재는 비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를 처형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교수대.



얼마나 넓은지....



세계 각국 언어로 된 안내 책자들



버스타고 나오면서 찍은 오쉬비엥침 역.....이 역을 통해서 폴란드로 온 수많은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는....
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
괜스리 보았다는 후회도...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는게 차라리 더 나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때의 생생한 기억으로 속이 매스껍다.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다.
다음 코스를 기대했다.
우울한 기분을 말끔히 씻어내 줄....
세계 12대 관광지로 알려진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입구.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돈을 주고 포토 스티커를 구입해야 한다.



전체 300여 km중에서 3km만을 관광코스로 개방한 곳인데 일단 관광을 시작하려면
빙~빙~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단을 내려가야만 한다.
이 소금광산은 지금은 작업을 하지 않지만
13세기부터 1996 년까지 700년 넘게 7,500 톤의 소금을 캐내던 곳으로
지하 1단계(지하 64m, 378계단)~9 단계(327m)까지 개발을 했는데
관광객들에는 지하 1 단계(64m)~3 단계(135m)까지만 관광을 허용되어
과거 주요 산업활동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이곳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은 1978년 제 1호로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



광산 내부의 온도는 14도, 공기 순환을 위해 콤프레셔로 지상에서 지하로 공기를 뿌리기에
공기순환에 의해 통로에는 바람이 강하여 출입문을 열고 닫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리고 암염에서 나오는 광산 내부 공기는 건강에 좋아
천식 환자들을 위한 재활 용도로도 쓰인다고 한다.
걸을 때 입을 벌리고 숨을연신 들이마셨다.
오늘 의상 선택을 잘못하여 추위에 무지 떨었고
계단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마릴린 먼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비알리츠카 소금층은 180만년에서 200만년 전에 형성된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이다.
오랫동안 바다였던 이곳은 물이 증발한 후 소금(염화 칼슘)만 남았고 암염이 되기 까지 약 1만 5천 년이 걸렸다.
그 뒤 발생한 지각변동은 이 소금 층이 복잡해진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진흙과 점토로 쌓인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물에도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소금 층은 서에서 동으로 약 10km정도 뻗어 나갔으며 두께는 500m에서 1.5km에 이른다.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은 약 5,000년이 넘게 존재해 왔다는 것은 11세기에 알게 되었다.
그 뒤 괄목 할 만한 발전이 뒤따랐으며 1996년 까지 소금을 채취 했었단다.



그 어느 누구도 혼자서 이 소금광산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반드시 광부 출신이거나 광부 교육을 받은 이 곳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관광을 해야 한다.
현재 소금광산엔 소금을 제거해내서 생긴 2040개의 방이 있다.
모든 방을 연결하는 복도의 길이는 약 200Km에 달한다.
그러니 혼자 들어갔다간 미로에 갇혀 평생 햇빛 구경을 못할 것이다.< br>


정말 소금일까? 혓바닥을 대보니 짜다. 정말 소금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크고 아름다운 방들이 나타난다.
이곳을 결혼식 장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음악 연주회를 하기도 한다. 갱도 안에는 모두 50개의 성당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킹가 성당.



이 여인의 상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폴란드에 소금을 선물한 킹가 공주의 상이다.
물론 소금으로 조각된 것



광산의 모든 조각상, 조각품 ,심지어 샹들리에 까지도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성당안의 모든 조각품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은
1935년 광부 안톤 비로테크의 작품으로 불과 7센치 밖에 안되는 두께에 조각하였는데
사실적이며 원근감이 뛰어나 과연 단순 노동자인 광부의 작품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이다.



계단에서 정체현상도 빚어지고 미술작품이 전시된 카페겸 전시장도 있고,
독일의 궁정극장의 감독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상도 있고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점.식당.우편물 취급소 없는 것이 없다.



이 반질반질한 대리석 같이 생긴 것도 밑기지 않겠지만 소금이다.



킹가 성당을 나와 또한번 놀라게 된다.
지하에 있는 많은 호수 중 깊이가 9미터에 이르는 에라즘 바라체즈 호수.
잘 보이지는 않는데 소금기둥이 호수 바닥부터 이어져 있지만
담긴 물은 염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기둥이 녹지 않는다.
손가락끝으로 살짝 찍어 혀끝에 대어봤더니 넘 짜서 얼얼하다



지하세계에 살면서 소금을 채취하여 바깥으로 내보내는 광부들의
신산했을 삶에 마음속의 감탄은 경이로움으로 변했으나 너무 피곤했다.
얼마쯤 걸어 올라오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지점에서 관광객들이 인산인해
1시간 정도를 기다리는데 미칠 것 같았다. 아우슈비츠의 기억도 지하에 있으니 새삼 다시 떠올랐고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날 관광객이 가장 많았다고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지하에 갇혀있었다.



바깥 세상으로 나오니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다.
크라코프 시내관광을 위해 버스로 이동


이 때가 9시 정도였고 약한 빗줄기가 한 두 방울 내린다



가이드를 따라 대충 훑어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크라쿠프는 1038년부터 1596년 바르샤바로 수도가 이전되기 전까지 558년 동안
폴란드의 문화, 경제, 정치, 예술, 종교의 중심지였다. 14~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크라쿠프 왕국은 체코의 보헤미안 왕국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중세 유럽의 문화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유럽에서 최초로 유네스코에 문화유산 도시로 지정된 크라쿠프.
이탈리아의 로마보다 먼저 선정했을 만큼 크라쿠프의 명성은 유럽에서 정평이 나 있는 천년의 도시다.
우리 나라에 경주가 있다면 폴란드엔 크라코프가 있다.
13세기부터 몽골과 터키에 의해 동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고 점령되었을 때도
크라쿠프만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1596년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 왕국의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긴 후에도 크라쿠프는
여전히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치러질 정도로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정에도 없던 야경을 보게 되었다.



크라쿠프의 중심부이자 구시가지의 중심부인 중앙광장은
총 면적 4만㎡ 광장으로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이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지만
중세 시대 도시의 광장으로서는 유럽 최대 규모이다.




나무에 살짝 가려진 이쁜 건물이 성 애달버트 성당.
600년 역사로 구시가지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이다.





크라쿠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이기도 하며 성 마리아 성당은
그가 로마 교황청으로 가기 전까지 봉직하던 곳이다.
또 얼마전 러시아 순방길에 올랐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폴란드 대통령 부부의 장례식을 치른 성당이다.



크라쿠프 최초의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라틴 십자가 셩태로 설계된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성당
성당 정면에 12사도 조각상과는 다르게 측면은 붉은 벽돌건물이라 특이하다.



남편이 제일 기대했던 곳인데 대충 훑어보게 되어 못내 아쉬워한다
나도 크라쿠프가 맘에 든다. 스페인 거리처럼 고풍스러워 유유자적 기웃거리고 싶었다.




흐르는 음악은 폴란드 출신 음악가 쇼팽의' 이별의 곡'를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릅니다

 

 

 

 

Dans La Nuit .. Sarah Brigh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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