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의 일상/자운영의 흔적

프로야구 개막전

올레리나J 2012. 4. 11. 22:05

 2012년 프로야구 개막전

올해는 팔도라면에서 스폰을 하는지

팔도 프로야구라는 깃발이 휘날린다.

 

식전 행사를 보려고

정오쯤 집을 나와 전철을 탔다.

 

남쪽으로 꽃구경 갈 계획을 세웠으나

늦추위로 인해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는다는 소식에

포기하고 야구장으로...

 

지정석은 이미 예매가 끝난 뒤라 구하지 못하고

일반석으로 입장하여 처음엔 3루쪽 꼭대기

기아 응원석에 앉았다가

음지여서 어찌나 추운지 햇볕이 비치는

외야쪽에 서서 타이거즈를 응원했다.

 

이 종범 선수가 없는

타이거즈는 이빨없는 호랑이나 마친가지

더구나 서재응 선수는 믿음이 안가고

결국  인천 SK VS 광주 KIA 전은

 6 : 2 로 SK 승...ㅠㅠㅠㅠ

 

난 경기 결과보다는

경기장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에 매료되었다.

 

선수들의 열정보다도

응원의 열기가

빨강, 노랑의 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이 함성과 함께 어우러져

활기가 넘친다.

젊음이 솟아나온다.

살아있음을 각인시킨다.

가슴 속의 열정을 부채질한다.

 

찬란했던 젊은날,

 타이거즈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아홉번 한국시리즈에 진출,

아홉번 우승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타이거즈.

타이거즈 역사속으로 들어가본다.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출신인 기업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 창단된 팀이었지만,

절대적인 선수 숫자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4명의 선수로 시작했다.

초대감독으로 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코치진과의 불화로 인해

한 달만에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기고 팽 당했고,

조창수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 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지명타자를 쓰지 않고

 선수교체도 없이 한 팀이 한 경기를 9명만으로 치른 경우가

 딱 2번 있는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

김성한의 투타 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꿀 일이었다.

 

 

 

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룡 감독을 영입하였고,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하면서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김응룡 감독은 부임 첫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한국시리즈에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일축하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후 84년과 85년은 잠시 주춤했지만,

86년부터 89년까지 무려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렬, 이강철, 조계현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룡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91, 93, 96, 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90년대에 들어 마운드에는 이대진과 임창용,

 타자진에는 이종범과 이호성, 장성호가 등장하여

선동열, 김성한의 뒤를 이었다.

 96년과 97년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선동렬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해

해태도 한물 갔다는 평을 뒤엎고 나온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98년 이후로 해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소위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모 회사인 해태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팀 전력이 약화되면서

 이전의 강력함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팀 입장에서 현금확보를 위한 면이 크다).

설상가상으로 IMF마저 겹치며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주력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 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그 와중에 김상진이 99년 시즌 도중 암으로 인해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이대진은 기나긴 재활인생을 보내기 시작하였으며,

임창용은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된다.

게다가 98~99 시즌에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했던

이호준마저 2000년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어받는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며,

결국 83년부터 장기집권 해오던 김응룡 감독은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삼성으로 옮겼고,

2001년부터 김성한 감독이 부임해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2001년,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당시 전남 연고기업 중 가장 대기업인 금호그룹에서

 타이거즈를 인수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끓었으나

금호는 프로구단에 관심이 없는 관계로 무산되었다.ㅠㅠ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은

다른 팀들에게는 공포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끈끈한 근성야구는

 오늘날의 입장에선 촌스럽기도 하고

 여타 문제들도 있긴 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인들의

 일상의 유일한 낙이요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워낙 전설적인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

지금의 KIA 타이거즈는

해태의 전설에 좀 눌려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응원가 목포의 눈물로도 유명하다.

또 해태의 검빨 유니폼은

아직도 올드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KIA 타이거즈의 팬들은

올드 유니폼 데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구단 쪽의 반응은 영 미지근하다가

2011년 7월 2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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