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의 일상/자운영 그를 사랑하다

구스타프 클림트

올레리나J 2010. 9. 2. 10:15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키스를 하고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빛나며 짧은 순간의 강렬한 감흥을 더해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 남아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 중 하나인 [키스](1907)는 어딜 가도 쉽게 복제품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본 기억의 그림이다. 이렇게 화려한 그림을 그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자연스럽게 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 화가가 바로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이다.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마저 그만 두었던 클림트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곱 명 중 둘째로 태어났다.

 금세공업자였던 아버지가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던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솜씨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빈의 국립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미술학교에서 클림트는 당시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실내장식과 조형물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몇 달 후인 12월에는 동생 에른스트가 독감에 이은 심낭염으로 사망했다.

 클림트는 그 슬픔으로 인해 3년 동안 창작의 위기를 맞는다.

 위기를 극복하고 제작한 [사랑](1895)은 그의 최초의 걸작이다. 

장식적인 배경과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랑의 형태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하는 연인들 뒤로 질투의 얼굴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행복 속에 숨어있는 불안을 의미한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 현실적인 내용과 추상적인 내용이 그림 화면 속에 동시에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동생 에른스트가 죽은 후 남은 조카의 후견인이 된 클림트는 36세에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1898)을 완성하는데 이 작품은 동생 에른스트의 딸을 그린 것이다.

흰색과 크림색이 섞여서 순수한 느낌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단발머리를 한 채 앞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눈은 세상을 향해 당당한 주인공의 태도를 형상화한다.

 황금을 사용함으로써 클림트의 ‘황금 스타일’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는 39세 그린 [유디트 I](1901)가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디트는 아름다운 미망인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클림트 작품 속의 유디트는 어떠한 숭고한 의지도 기상도 없다.

그저 죽은 장군의 머리를 든 채 황홀경에 빠져있을 뿐이다. 클림트는 유디트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애국심 보다는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인 파워, 그 ‘위험한 마력’에 주목하고 있다.

 

 

 

유디트 얼굴의 부드러운 표현이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우리는 잠시 얼굴 표정에 취한 후에야 비로소 작품의 오른쪽 아래 여주인공이 들고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는 8년 후 다른 방식으로 같은 주제를 재현했다. 작품 [유디트 Ⅱ ](1909)에서는 그림의 형태를 바꾸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냈다. 꼭 다문 입술과 가차없이 드러낸 젖가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민하고 긴장된 유디트의 구부러진 손 모양은 여인의 잔혹한 마력과 복수욕을 보여준다.

 

 

클림트에게 여성은 성녀 아니면 요부의 이미지였다


클림트는 역사상 여성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성들에 대해 매우 뚜렷한 이분법적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클림트에게 여성은 성녀(聖女) 아니면 요부(妖婦)였다. 직업 모델들은 클림트의 요구에 따라 매우 관능적이고 때로는 외설적이기까지 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의 모델들이 이런 포즈를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모델의 사이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클림트가 금전적으로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클림트가 죽은 후 사생아를 낳았던 여자들이 생계 부양비를 청구한 소송이 14건 이상이나 된다는 것은 그가 모델들과 얼마나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정을 나눴다고는 하나 클림트가 이들 모델들과 주고받은 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었다. 41살에 그림 [희망Ⅰ](1903)은 배가 부른 젊은 임산부를 표현한 것으로, 화가는 베일 한 장 없이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 그림 속의 여인인 짐머만 역시 클림트의 아이를 낳은 여성이다. 여성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생명 잉태의 힘으로 파악하여 어머니의 모습에 요부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켰음을 알 수 있다.

 

 

에밀리 플뢰게와의  플라토닉한 사랑

육체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평생을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에른스트 아내의 여동생 에밀리 플뢰게이다. 평생 동안 네 번 에밀리 플뢰게를 그렸던 클림트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해에 첫 번째 초상화 [열일곱 살의 에밀리 플뢰게](1891)를 그렸다. 이 중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그린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은 에밀리의 초상화로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드레스의 우아함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모델에게는 무관심한 척 하며 심리적 거리를 둔 흔적이 나타난다. 정작 에밀리와 그녀의 어머니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클림트는 다른 사람에게 이 그림을 팔았다. 믿기 힘든 사실은 클림트가 그녀에게 무려 400여 통의 엽서를 보내고 임종시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 또한 그녀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사랑은 플라토닉했다. 플뢰게 역시 클림트가 죽은 이후 그의 그림을 소장하거나 14명의 사생아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등 클림트의 가족보다 더욱 그를 챙기며 보호했다. 그리고 어떤 남자와도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니 그녀 역시 클림트에 대한 마음이 지고지순했음을 알 수 있다.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업 스타일인 금박을 사용한 그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은 화려하며 웅장하다. 나치 정권 시에는 히틀러의 소장품이기도 했던 작품이다. 히틀러가 그의 작품 몇 점을 강제로 소유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 당시 화가로서의 클림트의 명성과 인지도를 말해준다. 클림트는 살아 생전에 작품을 통해 부유한 삶을 누렸으며 상류층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고 한다. 상류층과의 교류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이 여인 블로흐바우어였다. 아델로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가 가장 선호했던 모델이자 후원가였으며 클림트와의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던, 엄청난 재벌집의 안주인이었다.


 

 

한편, 클림트는 자신의 성적 환상을 감추기 위해 신화의 주제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의 이야기는 클림트의 성적인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다나에](1907~1908)에 등장하는 다나에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시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딸이 낳은 아들한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듣고는 남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딸을 탑 속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다나에한테 반한 제우스는 부인인 헤라의 질투를 피해 황금빛 빗물로 변하여 그녀의 다리 사이로 스며들어 사랑을 나눈다. 그 결과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클림트는 밀실 속에 감금된 다나에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정사각형 화면 전체에 다나에를 그려 넣었다. 다나에는 성적 황홀감에 빠져 있으며 눈을 감고 있다. 왼쪽 아랫부분에는 금색 원형들 사이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검은 사각형이 있다.

 

 

 

스토클레 저택의 장식적인 벽화와 클림트의 만년


1903년에 벨기에의 실업가 아돌프 스토클레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에게 저택 건축을 의뢰하자, 요제프 호프만은 클림트에게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장식 벽화를 의뢰한다. 이는 클림트가 참여한 마지막 대형 공동작업으로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나간 나선 모양의 가지들이 둥글게 말려있는 당초 무늬의 벽화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재정 덕분에 유리, 산호, 자개, 준보석 등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벽화를 완성했는데 그 거대한 작품이 [생명의 나무](1905~1909)다. 저택의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이전의 클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스타일이다.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 긴 벽을 장식하고 있는 패널화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중앙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맨 왼쪽의 여인은 [기대](1905~1909)]인데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얼굴과 손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생명의 나무에 휘감겨 있는 왼쪽 여인은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풍의 인물과 추상화적인 배경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있다. [기대]의 맞은편 오른쪽에는 패널화 [성취](1905~1909)가 자리한다.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동양풍의 의상은 클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미술 양식의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1909년 부터 1910년 까지 클림트는 침체기를 보낸다. 번쩍이는 금빛 바탕과 세세한 무늬의 기하학적 장식 문양을 포기했고, 신화적 주제와 고전주의의 주제를 더 이상 다루지 않았다. 대신 풍부한 색감과 재질을 구사한 마티스나 반 고흐의 새로운 그림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1년 즈음 이 당시의 유럽에는 여러 흉조로 인해 세기말적 비관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 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그리고 1912년에는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클림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죽음과 삶](1911)에서 죽음의 신과 직면해 있는 인간 군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18년 1월 11일(56세) 클림트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클림트는 자기 자신이나 작품을 글로 표현하는 일에 ‘배멀미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할 만큼 글을 쓰는 일 역시 어려워했다. 더군다나 화가라면 한두 장 남긴다는 자화상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클림트는 자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자화상은 없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다른 형태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나는 스스로를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가끔 초상을 그린다